물고기가 성냥불을 삼킨 밤 / 김경주 물고기가 성냥불을 삼킨 밤 / 김경주 나는 어항을 경영하는 사람 어항 속에 성냥불을 던진다 금붕어 한 마리 다가와 불을 꿀꺽 삼킨다 금붕어가 환해진다 사건을 산책하는 어항 어항으로 쏟아진 무지개 뼈가 물 속을 훌렁훌렁 떠다닌다 내가 경영하는 이 어항에선 사실은 왜곡될 수 있지만 문장은 평..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2
대설 / 정양 대설 / 정양 마을 공터에 버스 한 대 며칠째 눈에 파묻혀 있다 길들이 모두 눈에 묻혀서 아무 데나 걸어가면 그게 길이다 아무 데나 들어서면 거기 국수내기 화투판 끝에 세월을 몽땅 저당잡힌 얼굴들이 멸칫국물에 묵은 세월을 말아 먹고 있을 외딴집 앞 눈에 겨운 솔가지 부러지는 소리 덜프덕 눈더..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2
다방에 관한 보고서 / 유홍준 다방에 관한 보고서 / 유홍준 우리나라 다방은 18,536개이다 우리나라 다방 종업원은 29,459명이다 오후 3시 38분 현재, 커피를 주문하는 인간은 5,047명이고 배달 가는 오토바이와 티코는 935대이다 지금 3급 카쎈타 더러운 쏘파에서 배달 나온 다방 레지의 젖을 만지는 놈은 2,304명 팁을 받으려고 치마를 걷..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2
공백이 뚜렷하다 / 문인수 공백이 뚜렷하다 / 문인수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붙였던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 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 주일이, 한 달이 헐어놓기만 하면 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2
누에 / 김기찬 누에 / 김기찬 누에는 기차와 닮았다 한 마리 길다란 누에가 혼신의 힘을 다해 뽕나무 가지를 오르듯 기차는 뽕잎 갉아먹는 소리를 내며 멀리서 레일 위를 밟고 온다 실크로드를 향해 가는 동안 알(卵)에서부터 오령(五齡)역 까지는 한 달이 걸린다 마침내 기차가 어둠의 터널에 들 듯 칸칸마다 투명한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2
실의 힘 / 송 희 실의 힘 / 송 희 청국장을 발효한 퓨전 음식이라고 스푼으로 똑똑 떼는데 끈끈한 실들이 엉겨 붙어 한 알 한 알 떼기가 여간 질긴 게 아니다 발효가 잘 되면 그 진득함이 1-2미터를 넘나든단다 몸을 다 썩히어서 풀기 쟁쟁한, 조그만 콩알을 바라보다 툭하면 끊어지고 주저앉는 사랑에 또 한 차례 마음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2
魔述悲歌 / 현택훈 魔述悲歌 / 현택훈 오후에 마술이 비가에게 전화를 걸고 비가는 그러자고 한다 그러자 당나귀가 천천히 술잔 속으로 미끄러진다 지난 선인장의 요일엔 비가가 마술에게 편지를 보냈다 답장은 사막 한 가운데서 햇빛에 녹아버렸다 저녁바람이 마술비가가 있는 건물을 어루만진다 그때가 고양이의 해였..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2
철물점 여자 / 홍정순 철물점 여자 / 홍정순 예외 없다 사람 손 가야 비로소 제값 하는 무수한 연장들 틈새에서 시 쓰는 여자가 있다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여덟 시까지 못 팔아야 살지만 못 팔아도 사는 여자 십 년 전 마음에 심은 작심(作心)이라는 볼트 하나 너트로 한 바퀴 더 조여야 하는 사월은 성수기 작업 현장에 연장..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2
소리의 탑 / 설태수 소리의 탑 / 설태수 첼로 연주 소리가 들린다. 지그재그로 공기를 찢으며 다가 온 音波가 나를 흔든다. 소리를 낸다는 것은 대기에 상처를 낸다는 것. 첼리스트의 움직임에 따라 가슴에 파고드는 그 상처에 넋 나간 듯 사로잡혀 있으니 감동이라는 말은 형형색색으로 파헤쳐진 영혼의 상처를 美化시킨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2
이 봄의 방화범 외 1편 / 한영숙 이 봄의 방화범 외 1편 / 한영숙 꼼지락거리는 봄의 압력을 가누지 못해 가스 찬 압력밥솥처럼 겨울들이 폭발음을 내며 뚜껑을 박차고 탈옥한다 혈당농도 짙은 텁텁한 단백질의 하늘에서는 도무지 식을 줄 모르고 굴뚝 뭉글뭉글 게워낸 눈엣가시 스모그 떼들 꼴사나운 잡바람의 삐끼들이 활보하며 장..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