弔燈이 있는 풍경 / 문정희 弔燈이 있는 풍경 / 문정희 이내 조등이 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를 했으니까 우는 척만 했다 오랜 병석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죽었다 내 엄마, 그 눈물이 그 사람이 죽었다 저녁이 되자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내..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11.10
放心 / 손택수 放心 /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 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 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11.10
자작나무 내 인생 외 2편 / 정끝별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 속 깊은 기침을 오래 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기에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11.10
어둠은 별들의 빛남을 위하여 -우수의 바람 2/김후란 어둠은 별들의 빛남을 위하여 -우수의 바람 2/김후란 어둠은 별들의 빛남을 위하여 더욱 짙은 어둠으로 침묵한다. 밤은 어디서부터 와서 어느 깊이로 잠드는가 별빛 눈부신 밤 흐르는 것의 멈춤이 있음을 생각하며 별들 몸짓 사이로 깊이 모를 꿈을 가늠해 본다 오늘은 나도 누군..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11.04
포장된 슬픔 / 구순희 포장된 슬픔 / 구순희 바다 변두리만 기웃거리는 게는 그 단단한 껍데기 속 창자가 없어 창자 끊어질 일 없다고 하지만 아니다 곧장 앞으로 가지 못하는 숙명은 이미 창자가 다 끊어져 더 이상 문드러질 게 없다 모래더미 속으로 어린 게가 어미게 속으로 필사적으로 파고들어간다..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1.04
형상기억합금 / 서상만 형상기억합금 / 서상만 비탈길에 지친 산개구리 한 마리 풀잎에 털썩 주저앉자 놀란 풀잎, 휘청휘청 땅바닥에 큰절하듯 엎드린다 보라! 저 작은 무게에도 출렁대는 삶 풀잎이 허리를 비틀자 산개구리 퍼뜩 알아채고 노을 너머 몸을 던진다 가녀린 풀잎 휘리릭 그제야 왔던 길 되돌..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1.04
놋쇠요령 / 서상만 놋쇠요령 / 서상만 ― 아내의 방 망미동 골동품 가게에서 놋쇠요령 하나를 샀다 젊은 날, 아내의 곱던 목소리같이 살짝 흔들어도 청아한 울림 파랗게 녹이 슬어 백년은 더 되었다고 가게주인이 세월에 덤을 달았다 이 요령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말문을 닫고 검불로 누운 그녀 침상..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1.04
슬리퍼 / 이문숙 슬리퍼 / 이문숙 지압 슬리퍼를 팔러 온 남자를 보고 생각났다 작년에 신다 책상 아래 팽개쳐 뒀던 슬리퍼 먼지를 폭삭 뒤집어쓰고 까마득 버려져서도 슬리퍼는 여전히 슬리퍼다 기억이란 다 그런 것이다 기억 속에는 맨홀 뚜껑 같은 확실한 장치가 없어서 그 아래 무언가를 고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1.04
국화꽃 장례식 / 최문자 국화꽃 장례식 / 최문자 단추 하나가 뚝 떨어진다 옷은 하나도 아프지 않다 남은 단추 세 개를 자세히 보니까 국화꽃 모양으로 생겼다 남은 국화꽃 세 송이도 아프지 않다 아프지 못한 것들은 수상하다 국화꽃 형상을 하려는 것들도 수상하다 반짝하고 설명이 안 되는 부표들 아프..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1.04
몸살 / 김인숙 몸살 / 김인숙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 길게, 멀리가고 싶은 몸 가두었다 주전자가 몸살을 앓는지 부글부글 열이 오른다 갇힌 것이 병이 된 모양이다 지독하게 긴 혼자만의 싸움이다 수양버들 가지처럼 늘어지는 오후 오월 산란기의 열목어 한 마리 계곡 아래 깊은 여울로 가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