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적 우연 / 이운진 우주적 우연 / 이운진 우주를 가로질러 오는 그대가 만약 그라면 나는 지구의 속도로 걸어가겠어 시속 1674km의 걸음걸이에 신발은 자주 낡겠지만 지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건 사랑을 믿는 이 별의 아름다운 관습처럼 살고 싶어서였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높..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2.29
나는 가고 나만 / 한미영 나는 가고 나만 / 한미영 럭셔리한 호텔 커피숍 젊고 세련된 남자 바리스타 흰 와이셔츠에 단정하게 앞치마 두르고 루왁커피 한 잔 내어민다 사향고양이 뱃속에서 익힌 커피 알맹이 그 배설물로 만든다는 똥커피다 내 어린 시절 할머니 봉지담배를 쟁여 곰방대 피우실라치면 팔각..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2.29
어머니의 밥상 / 우옥자 어머니의 밥상 / 우옥자 서너 걸음 늦게 수저를 드신 어머니, 식구들이 남긴 국을 마저 드시고 몇 오라기 나물과 마지막 김치조각까지 차례로 비운 후, 허기진 식사를 달게 마치셨다 '좋고 맛난 것만 먹을 수 있겄냐' 식구들 지청구에도 아랑곳없이 '이 땀 봐라, 모다 귀한 것이여'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2.29
담쟁이 / 정미경 담쟁이 / 정미경 거칠고 구부정한 소나무 밑동 타고 올라 구불구불 서툰 필체로 소나무를 받아 적는다 한 그루 기어이 완독하겠다고 솔향기 솔솔 베껴 그린다 소나무는 담쟁이의 노트 푸른 글씨 등걸에 빼곡하다 저 글씨 밑동부터 솥에 고아낸다 손마디 거칠고 등 굽은 아버지 평..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2.29
한계령을 위한 연가 외 19편/문정희 우울증 / 문정희 겨울 안개 길고 긴 터널 모든 것이 무사해서 미친 중년의 오후 전조등 하나 없는 회색 속을 걸어간다 가방에는 몇 개의 열쇠가 들어 있지만 진실로 갖고 싶은 열쇠는 없다 기적이란 신의 소유만은 아니었구나 지나온 하루하루가 모두 기적이었다 돌아보니 텅 빈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11.16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열매를 맺고/문태준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열매를 맺고/문태준 외떨어져 살아도 좋을 일 마루에 앉아 신록에 막 비 듣는 것 보네 신록에 빗방울이 비치네 내 눈에 녹두 같은 비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열매를 맺고 나는 오글오글 떼 지어 놀다 돌아온 아이의 손톱을 깎네 모시조개가 모래를 뱉..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11.10
가재미/문태준 가재미/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실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켝 눈물 쏟아 낸다 한쪽 눈이 다른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11.10
우울한 스타킹 / 신현림 우울한 스타킹 / 신현림 진흙눈이라도 퍼부울 듯이 하늘이 우울하다 유언장처럼 십이월은 우울하다 매년, 일년은 사서 금방 올이 나가는 스타킹이다 스타킹 끝을 잡은 당신은 쓸쓸해서 살바도르 달리의 시계처럼 흐물흐물해질 것 같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탄광의 석탄처럼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11.10
나의 싸움 / 신현림 나의 싸움 / 신현림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것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위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11.10
초승달, 밤배, 가족사진 / 최정례 초승달, 밤배, 가족사진 / 최정례 끝을 날카롭게 구부리고 지붕 위를 떠 가는 초승달 왜 입 안에 신 침이 고이는 것일까 껍질 반쯤 벗겨진 사이로 신물 주르륵 흘러내리고 노란 껍질 익다 못해 터진 그 사이로 안개처럼 떠 있는 앞에는 키작은 아이들 뒤에는 두루마기를 입은 100년..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