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나무 열매 / 조현명 젓나무 열매 / 조현명 아내가 숲길에서 품고 온 단단하니 안으로 걸어 잠그고 둥글게 웅크린 그래서 단단한 새알 같은 열매 커다란 접시 위에 놓았더니 제법 향을 내어 거실 가구들이 킁킁댄다 잊혀 질만큼 해가 드나들었던가 말았던가 바람이 드나들었던가 말았던가 아이의 손끝에서 그만 퍽 바스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22
슬로우 모션 / 김기찬 슬로우 모션 / 김기찬 갈매기 한 마리가 허공을 유유히 날면서 머리를 갸웃갸웃 하더니 갑자기 수직하강 하는 것이다 한순간 팽팽해진 수면이 파닥파닥 깨졌다가 다시 팽팽해지는 사이 불쑥 솟아올라, 물고기 한 마리를 통째로 문 채, 유유자적하는 그 길고도 짧은 시간 다 쓰고도 그대로인 허공 <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22
흙을 빚어 만든 무거운 주전자에는 / 온형근 흙을 빚어 만든 무거운 주전자에는 / 온형근 흙을 빚어 만든 무거운 주전자에는 한가득 녹차 우린 물이 담겨져 있다 녹차였을 더운 입김이 두꺼운 주전자를 빠져 나와 바깥 칭얼거림을 외벽에서 내벽으로 받아들이고 주둥이에 헛한 바람구멍이 뚫려 있음을 본다 따르는 동안 손잡이는 기운 적 없는 단..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22
나무의 육화 / 온형근 나무의 육화 / 온형근 싹이 트고 잎이 튼다 가지였나 싶었던 이내 굵어지는 가지에게 줄기는 강건하다 나무는 가끔 생채기를 낸다 연한 가지는 굵직한 줄기가 버거워 털어진다 매달려 있던 생을 제 힘으로 서 있게끔, 지상으로 거처를 이룬다 한적한 숲에서 풀과 벌레를 육화시키며 무게를 덜어 낸 줄..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22
목련봉방 (木蓮蜂房) / 신미나 목련봉방 (木蓮蜂房) / 신미나 나, 저 꽃봉속에 몰래 살림을 차려 딱 십오촉 밝기로만 살았으면 지붕을 거쳐 굴러간 별구슬 불러다 유년의 앞마당 소란했으면 그릇 부딪히는 소릴 들으며 설거지하고 꽃가지에 이불 널어 너와 나 희게 펄럭였으면 텃밭에는 자잘한 비밀 몇 톨 심어두고 뒤꿈치에 꿀물 묻..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22
낙법의 기술 / 나혜경 낙법의 기술 / 나혜경 산을 내려오다 빙판길에서 미끄러졌는데 크게 다친 데는 없다, 낙법을 배웠냔다 아, 나도 모르는 사이 몸에 익힌 낙법? 그거 별거 아니네 하긴 살얼음판 같은 세상, 미끄러지는 일에 이제 이골났다 미끄러질 때마다 가볍게 털고 일어났던 게 날개 없는 삶이 가르쳐 준 낙법의 기술..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22
그랬으면 좋겠네 / 이시하 그랬으면 좋겠네 / 이시하 애인이 빨리 늙어 소처럼 느리고 순해지면 좋겠네 빨리 늙은 애인이 느지막이 일어나 찬 없는 밥을 우물우물 먹고 나서 산수유 꽃 피었드만, 그거나 보러 가지, 그랬으면 좋겠네 사람구경도 참 쏠쏠하구먼, 천천히 걷지 뭐, 그랬으면 좋겠네 강 언덕에 시름도 없이 앉아서는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22
매화 분합 여는 마음 / 서안나 매화 분합 여는 마음 / 서안나 당신이 북쪽이라면 나는 북쪽을 향해 처음 눈을 뜬 누룩뱀 북쪽으로 돌아앉아 참빗으로 머리 빗어 내리면 연서를 쓰던 손가락이 쏟아진다 가고, 오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 버들눈썹 그리고 빈 배처럼 흔들릴거라 방문 닫아걸고 더운 피 식히며 남은 꽃이나 피우는 늙은 투..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2
초읍종점 부근에서 / 권주열 초읍종점 부근에서 / 권주열 아네스! 언약도 없이 눈이 내리고 내 너를 기다리는 초읍종점 부근에는 전화선 매설작업이 한창이다 이 겨울날 이마에 땀이 서린 인부를 보며 네 생각에 젖어 베어나는 내 땀이 쑥스럽기도 하지만 시린 손을 비비며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서 밤이 어둠으로 캄캄히 누..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2
담쟁이덩굴의 독법 / 나혜경 담쟁이덩굴의 독법 / 나혜경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이 저랬던가 붉은 벽돌을 완독해 보겠다고 지문이 닳도록 아픈 독법으로 기어오른다 한번에 다 읽지는 못하고 지난해 읽다만 곳이 어디였더라 매번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다 보면 여러 번 손닿는 곳은 달달 외우기도 하겠다 세상을 등지..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