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 박후기 빈집 / 박후기 말뚝 앞에 무릎 꿇은 소처럼, 재개발지구 빈집 한 채 전신주에 몸 묶인 채 순하게 앉아 있다 ㅅ자 슬레이트 지붕 길마*처럼 걸치고 자꾸 미끄러져 내리는 늙은 호박 넌출 가까스로 추켜올리고 있다 벽마다 균열이 뿌리 내리고, 문이란 문 모두 열어젖힌 채 깊은 한숨 쉬는 이 집의 마지막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어느날 왕십리역에서 / 노유섭 어느날 왕십리역에서 / 노유섭 녹슨 철도와 개망초꽃 사이로 풍물시장을 스쳐간 사람들 어른댄다 닭갈비 목살 껍데기 꽃 삼겹살 치킨하우스 중국성 빛바랜 간판들은 바람만 불면 한껏 굽은 허리를 곧추세우는데 무작정 상경한 내 집의 꿈만이 아직도 타워 크레인 아래 집어등 불 밝히고 있다 시집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그 사막을 다 마셔야 한다 ./ 김신영 그 사막을 다 마셔야 한다 ./ 김신영 가시 이파리에 비가 떨어지고 선인장의 발목 뿌리를 적시고 모래언덕을 적시고 사막을 두루 적실 때 한 방울 물도 네 뿌리 곁에 두어 모두 네 몸속에 가두어야 한다 일 년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은 가시로 진화한 네게 내리는 축복 네 몸속에 머물러 굵은 줄기를 한껏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마음의 마디 / 정재록 마음의 마디 / 정재록 엑스레이에 찍혀 나온 내 손가락들이 대나무를 닮아 있다 내 손은 크고 작은 다섯 주의 대나무가 서있다 엄지는 마디가 두 개, 다른 손가락들은 세 개씩이다 손가락들은 더 이상 마디가 늘지 않는 대신 그 마디를 꺾어 뭐든 움켜쥘 수 있다 대나무처럼 마디가 늘어나면 더 많은 걸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매화 2 외 1편 / 윤희환 매화 2 외 1편 / 윤희환 벌, 나비 밤새워 초례청 드나드니 매실 과원 온통 들썩거린다. 첫날밤 짧다. 연분홍 새댁. 아침 이슬에 치마끈 고쳐 맨다. 봄봄 / 윤희환 봄 과원에 일제히 복사꽃 지펴 가지마다 날씬한 연분홍 스타킹- 하늘 향해 치켜든 저 각선미! 시집 <깊은 물속에 누워 있었네> 2008년 대학..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늙은 선풍기를 위하여 / 엄원태 늙은 선풍기를 위하여 / 엄원태 고모님께서 한 십년 쓰시다가 미국 이민 가시면서 물려주신 일제 산요 선풍기가 우리집에 온지도 이십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해마다 여름 맞아 이놈을 꺼낼 때마다 속초 처가 진돗개 진희를 겹쳐보게 됩니다 새끼들 쑥쑥 잘 낳아 퍼뜨리며 한 이십 년 가까이 잘 늙어 웬..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물방울 무덤들 / 엄원태 '윤동주 문학상 우수상' 작품 중에서 물방울 무덤들 / 엄원태 아그배나무 잔가지마다 물방울들 별무리처럼 맺혔다 맺혀 반짝이다가 미풍에도 하염없이 글썽인다 누군가 아그배 밑동을 툭, 차면 한꺼번에 쟁강쟁강 소리내며 부스러져 내릴 것만 같다 저 글썽거리는 것들에는 여지없는 유리 우주가 들..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풀밭 3 / 권도중 풀밭 3 / 권도중 바람 자유로운 곳 바람처럼 살다 너는 언제 이렇게 자라 근심처럼 가득한가 저절로 푸르게 자란 들판같은 생각아 이 편한 그리움도 풀 자라듯 자라나면 잡을 수 없던 너는 무슨 구름 피워 올까 이 풀밭 비가 내리면 내가 젖어 가리라 시집 <네 이름으로 흘러 가는 강> 2008. 고요아침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봄이 입력된다 / 오남구 봄이 입력된다 / 오남구 지금 봄이 전철로 입력된다 레일과 전동차 나는 하나로 묶여 레일 위로 전동차가 가고 전동차 속에 내가 있다 내가 분열해야 할 지잠은 을3역 봄이 휙 하고 압력되자 반사적으로 튀어나왓다. 그런데 불시착? 종3역 기호가 깜박이고 떨거덕 떨거덕 달아나는 전동차 뒷모습이 을3..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오리의 살림 / 정병근 오리의 살림 / 정병근 비 오는 강에 오리들이 떠 있다 쓱쓱 미끄러지며 다니는 것 같지만 수면 밑, 오리의 발은 바쁘다 ‘허벌나게’라는 말이 딱 어울리게, 호미 같은 머리를 물속에 박았다 뺐다하며 먹이를 찾는다 머리를 박고 있는 잠깐 동안, 오리는 다른 오리들과 단절된다 혼자 허기를 채워야 한..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