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검의 애인 / 이기와 주검의 애인 / 이기와 안개 짙은 날 공동묘지에 나가 잘 여문 주검 한 구를 캐와 내 침상에 뉘어 놓고 신방을 치루고 싶다 그도 외로웠고 나도 외로웠으므로 두 장의 갈잎처럼 포개 누워 숨결을 나눠도 그와의 키스는 얼마나 먼가 음악같이 흐르는 침묵을 팔베개하고 서늘하고 넓은 황량함의 품에 코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물의 베개 / 박성우 물의 베개 / 박성우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산양 / 이건청 산양 / 이건청 아버지의 등 뒤에 벼랑이 보인다. 아니, 아버지는 안보이고 벼랑만 보인다. 요즘엔 선연히 보인다. 옛날, 나는 아버지가 산인 줄 알았다. 차령산맥이거나 낭림산맥인 줄 알았다. 장대한 능선들 모두가 아버지인 줄만 알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었다. 푸른 이끼를 스쳐간 그 산의 물이 흐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눈 내린 날의 첫 줄 / 문인수 눈 내린 날의 첫 줄 / 문인수 비쩍 마른 검둥개 한 마리가 잰걸음으로 지나간다. 네 발바닥, 뜨고 닿는 동작이 순서대로 다닥다닥 바쁘다. 꽃 자국 나는 바닥과 병뚜껑 따는 것 같은 허공이 지금 일직선으로 길게 달라붙는 중이다. 브라더미싱. 어머니 재봉틀 소리 멀어져가는 것 같다. 저 개, 방향을 꺾..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개밥바라기 / 박형준 개밥바라기 / 박형준 노인은 먹은 것이 없다고 혼잣말을 하다 고개만 돌린 채 창문을 바라본다. 개밥바라기, 오래전에 빠져버린 어금니처럼 반짝인다. 노인은 시골집에 혼자 버려두고 온 개를 생각한다. 툇마루 밑의 흙을 파내다 배고픔 뉘일 구덩이에 몸을 웅크린 채 앞다리를 모으고 있을 개. 저녁밥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시네마 봄 / 박이화 시네마 봄 / 박이화 영화 '취화선' 이 칸 영화제에서 국제적 조명을 받던 날 우리 집 정원의 모란은 어느새 봄날의 스크린 밖으로 조용히 떠나가고 없었지 그래 자고로 여배우란 인기절정의 순간에 화려하게 떠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지난날 추억의 벚꽃처럼 뜨거운 봄날의 앵콜을 뒤로 하고 바람과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가시 / 한이나 가시 / 한이나 독으로 약이 올라 한숨이 화가 되고 한이 되어 몸이 주저 앉는 깊은 병이 들거들랑 생가시 나뭇가지를 가마큰솥에 오래오래 삶아 보라 아들 먼저 앞세운 스물 셋 청상 어머니의 한숨의 깊고 푸르다 누구든 그런 고질병엔 엄나무 강한 가시가 약인즉 그대여 중류된 맑은 물 같은 소주를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오월 외 1편 / 조연호 오월 외 1편 / 조연호 비 내리던 오월이 그쳤다 숲이 가난한 자들의 빈 그릇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모서리에 몰려서서 심장이 저울질 당하는 소리를 들었다. 부드러운 비에 꽂혀 하늘이 아프게 하수구까지 걸어온다. 쥐들의 지붕타는 소리가 엄마의 재봉틀타는 소리보다 크다. (뜻도 없이 문이 밀쳐지..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목련꽃을 보면 양변기가 생각 난다 / 김봉식 목련꽃을 보면 양변기가 생각 난다 / 김봉식 목련나무들이 자위를 했다 돌돌 뭉쳐진 크리넥스 티슈가 발에 밟힌다. 발정난 저 놈들, 밤새도록 방문 걸어 놓고 가려운 제 성기를 벅벅 긁었나 보다 달큰한 향내가 아파트 단지에 그득하다 성기가 몸보다 먼저 자라는 것들은 사춘기의 격렬한 속성을 가지..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봄 외출 / 장옥관 봄 외출 / 장옥관 고삐를 풀어놓았다 몸집 작은 까만 개가 살여울처럼 뛰쳐나간다 치켜든 꼬리 아래 아, 항문이 복사꽃 같다 영문 모르는 벚꽃이 놀라 몸을 움츠린다 노란 민들레꽃 지린내 아른아른 아지랑이 피어오른다 오줌을 갈긴다 앞서 달려나가던 개가 찔끔 오줌을 갈기니 따라가던 다른 놈이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