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것 / 노준옥 내가 가진 것 / 노준옥 내게는 왼쪽 귀를 앓는 아들과 불면증이 있는 남편이 있다. 정신병원에서 약을 타 먹어야하는 어머니가 있고 이혼의 위기에 처한 동생이 있다. 내게는 부도가 나고 택시기사가 된 오빠가 있고 어릴 때 집을 나가 소식 없는 소아마비의 언니가 있다. 나를 건너간 숱한 연인들 대신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푸른 안부 / 유순예 푸른 안부 / 유순예 스무 살 그녀를 꼬득이던 스물 다섯의 청년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그 전주 거시긴디요 유순예씨 맞는가요? 호적부 뒤적거려서 수년 전에 찾아냈는디 손가락이 떨려서 이제야 전화를 했네요 아침밥 해서 애들 둘 학교에 보내고 큰놈은 대학생이 되어 타지로 나가고 마누라 몸이 성..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안녕, 김밥 / 심언주 안녕, 김밥 / 심언주 김밥천국 아줌마는 천국을 말고 있어요. 어두운 하늘 같은 김 한 장을 펼쳐 놓고 곤두서는 밥알을 꾹꾹 눌러요. 밥알 위에 당근 채찍 우엉 부엉 어영 부영을 눕히더니 검은 멍석을 둘 둘 둘 말아요. 잘린 것, 지지고 볶은 것들이 비어져 나오려 야단이에요. 저 검은 파이프. 식도 같..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녹색어족에 관한 리포트 / 김평엽 녹색어족에 관한 리포트 / 김평엽 나무는 말을 할 때마다 온 몸을 떤다 그게 그들의 관습인 것을 물푸레 허리를 만질 때 알았다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그들의 언어체계 일명 녹색어족이라 분류되는 언어, 소위 침엽어군에 속하는 잣나무라든가 활엽어군에 속하는 굴참나무 층층나무가 주동하여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저 닭을 잡아먹자 / 이원규 저 닭을 잡아먹자 / 이원규 외로워서 안 되겠다 저 닭이라도 잡아먹자 산중의 외딴집 찔레 덤불 억새밭에 정란아 유정란 잘도 낳더니 족제비 사냥개들에게 하나 둘 목울대를 내어주고 앞마당의 검은 이단자 오골계와 꼬끼이 ㅋㄹㄹ 끝끝내 득음 못 한 장닭마저 내장이 드러나고 말았으니 정란아 무정..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홍어 / 신정민 홍어 / 신정민 말이 좋아 삭힌 거고 숙성이지 결국은 조금 상한 것 아니겠는가 시들어 꽃답고 늙어 사람답고 막다른 골목이 길답고 깨어 헛것일 때 꿈답던 꿈 우리의 한 시절은 모두 비非철에 이루어진다 냉동실에 안치된 채 구천을 떠돌고 있는 박봉규씨만 봐도 그렇다 노점공구상 그가 폭력적인 단..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진화론(進化論) 외 1편 / 정다혜 진화론(進化論) 외 1편 / 정다혜 내 늑골에서 떼어낸 연골로 새로운 콧대를 만들었다. 늑골이 코로 진화해 오는데 정확하게 세 시간이 걸렸다. 나에게 세 시간이라면 시시한 시 한 편을 쓸 시간 교통사고로 지워졌던 내 코가 일부 복원됐다. 아니 이건 진화 어둔 내 몸속에서 웅크리고 살았던 늑골의 순..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오미자술 / 황동규 오미자술 / 황동규 오미자 한 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分子)가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 매일 살짝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 말까 주저하다..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책장애벌레 / 이종섶 낡은 책장은 망치로 부수는 것보다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것이 더 간단하다 나무의 이음새마다 박혀있는 나사못 숨쉬기 위해 열어놓은 십자정수리를 비틀면 내장까지 한꺼번에 또르르 딸려 올라오고 허물처럼 남아있는 벌레의 집에 어두운 그.. 신춘문예 당선詩 2010.01.29
천연남해댁 / 이민화 천연남해댁 / 이민화 남해에서 태어나 매생이 아내가 된 여자 한번도 바다를 떠난 적이 없다 하여 별명이 붙여진 천연남해댁, 출세한 아들이 찾아와 편히 모시겠다며 바다를 팔자고 속닥거린다 덜컹, 아들 꼬드김에 팔자를 팔고 상경한 한양 땅 별과 달이 높아 눈물 마를 날이 없다 가슴 웅크린 남해는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