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 / 고영민 평상 / 고영민 볼일을 보려고 읽던 책을 잠깐 평상에 내려 놓았는데 휘리릭, 바람이 읽던 책을 반을 읽고 간다 삼복에 끙끙 오기로 잡고 있던 왕필본 老子 한권을 침도 묻히지 않고 단숨에 반을 읽어 넘겨 버렸다 책장 넘기는 것을 서서 지켜본다 휘릭, 휘릭 더 이상 章이 넘겨지지 않는다 뻔하다는 걸..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오래된 수틀 / 나희덕 오래된 수틀 / 나희덕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 팽팽한 그 시간 속에서 녹..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제22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수상작 제22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수상작 섶섬이 보이는 방 / 나희덕 - 이중섭의 방에 와서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 신춘문예 당선詩 2010.01.29
진주신문 2005년 신춘문예 당선작 진주신문 2005년 신춘문예 당선작 봄날의 부처님 / 김애리나 쉿, 부처님 주무시는 중이세요 햇살이 부처님의 이마에 키스하고파 법당 안을 기웃대는 봄날이었지요 졸립지요 부처님? 그래도 봄인데 나들이는 못 갈망정 마당 가득 피어난 꽃나무 좀 보세요 산사나무 조팝나무 매자나무 꽃들이 치마를 올.. 신춘문예 당선詩 2010.01.29
2007년 진주신문 가을문예 당선작 2007년 진주신문 가을문예 당선작 보이저氏 / 김현욱 1. 보이저* 氏의 돌잔치는 지구 밖에서 열렸다 보름달 위에 차린 돌상을 받아 홀로 돌잡이를 하였는데 웬일인지 보이저氏는 아무 것도 집지 않았다 돌상 너머 파랗게 빛나던 구슬은 이미 멀리 있다는 걸 보이저氏는 운명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신춘문예 당선詩 2010.01.29
2001년 중앙신인문학상 [2001년 중앙신인문학상] 복숭아 / 서광일 비닐봉지가 터졌다 우르르 교문을 빠져나오는 여고생들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복숭아 사내는 자전거를 세우고 떨어진 것들을 줍는다 길이가 다른 두 다리로 아까부터 사내는 비스듬히 페달을 밟고 있던 중이었다 허리를 굽혀 복숭아를 주울 때마다 울상이던 .. 신춘문예 당선詩 2010.01.29
참빗 외 1편 / 양은창 참빗 외 1편 / 양은창 담양 장에서 날렵한 참빗을 하나 샀다 요즘 세상에 무슨 참빗이냐고 아내는 한사코 말렸지만 행여 외도라는 게 이런 것인가 평생을 바람만 머리에 이고 살았다는 여자를 몰래 데리고 오는 길 아직도 푸른 색정이 감도는 빗살을 살살 문지르며 한 성깔 하던 여자, 마디마다 맺혀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북어 / 권순자 북어 / 권순자 입 벌린 북어 한 마리 퀭한 눈에 허공을 담아내고 있다 숱한 울음 토해낸 북어 빈 가슴 들어 풍경소리 낸다 물길 수 백리 휘저으며 멀고 고단한 길 저어온 지느러미 바싹 마른 지느러미, 더 이상 바다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한껏 가벼워진 몸 일으켜 허공으로 날아갈 기세다 세상의 날개 없..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손택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손택수 명절 앞날 세탁소에서 양복을 들고 왔다 양복을 들고 온 아낙의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내 양복 주름이 모두 아낙에게로 옮겨간 것 같다 범일동 산비탈 골목 끝에 있던 세탁소가 생각난다 겨울 저녁 세탁, 세탁 하얀 스팀을 뿜어내며 세탁물을 얻으러 다니던 사내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
가을 바다 / 강희근 가을 바다 / 강희근 비온 뒤 가을 바다는 조선 삼베, 삼베올처럼 적당히 거칠다 바다 아랫도리가 도시 앞바다 얼굴을 하고 있다 해수욕장 기인 모래사장도 살갗이 텄다 섬을 보면, 까끌 까끌한 바람이 지난 철 꿈의 명암을 뜯어내고 있는 중이다 수평선이 중심이다 가을은 여기서부터 쓸쓸함 또는 쓸쓸..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