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서(書) 생명의 서(書) - 유치환 -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灼熱)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09.02.06
귀 천 (歸天) 귀 천 (歸天) - 천상병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창작과 비평>(..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09.02.06
낙 화 낙 화 - 이형기 -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09.02.06
설날 아침에 설날 아침에 - 김종길 -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 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09.02.06
성 탄 제 성 탄 제 - 김종길 -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09.02.06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09.02.06
나룻배와 행인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09.02.06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搭) 위에..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09.02.06
서 시 서 시 - 윤동주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09.02.06
검은 강 검은 강 - 박인환 - 신(神)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후의 노정(路程)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情欲)처럼 피폐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 거기엔 일체의 불순한 욕망이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09.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