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하다 / 김기택 절하다 / 김기택 수십 마리의 통닭들이 좌판 위에 납작 엎드려 절하고 있다 털을 남김없이 벗어버린 나체로 절하고 있다 발 없는 다리로 무릎 꿇고 머리 없는 목을 공손하게 숙여 절하고 있다 목과 발을 자르고 털을 뽑은 주인에게 죽음의 값을 흥정하는 손님에게 이미 죽은 죽음을 끓여..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11.30
고속도로 / 김기택 고속도로 / 김기택 거무스름한 길이 뽑혀져나온다. 지름이 십 미터도 넘을 것 같은 굵은 밧줄이 뽑혀져나온다. 지평선에서 산허리에서 숲에서 쉴새없이 뽑혀져나온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지치지 않고 뽑혀져나온다. 박찬호의 직구 같은 속도로 뽑혀져나온다. 거칠 것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2.11.25
직소폭포/안도현 직소폭포/안도현 저 속수무책, 속수무책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필시 뒤에서 물줄기를 훈련시키는 누군가의 손이 있지 않고서야 벼랑을 저렇게 뛰어내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오 물방울들의 연병장이 있지 않고서야 저럴 수가 없소 저 강성해진 물줄기로 채찍을 만들어 휘..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2.11.25
국화꽃 그늘과 쥐수염붓 / 안도현 국화꽃 그늘과 쥐수염붓 / 안도현 국화꽃 그늘이 분(盆)마다 쌓여 있는 걸 내심 아까워하고 있었다 하루는 쥐수염으로 만든 붓으로 그늘을 쓸어 담다가 저녁 무렵 담 너머 지나가던 노인 두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한 사람이 국화꽃 그늘을 얼마를 주면 팔 수 있느냐고 물었다 또 한 사람은..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2.11.25
그 아무것도 없는 11월/문태준 그 아무것도 없는 11월/문태준 눕고 선 잎잎이 차가운 기운뿐 저녁 지나 나는 밤의 잎에 앉아 있었고 나의 11월은 그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무덤에 불과하고 오로지 풀벌레 소리여 여러번 말해다오 실 잣는 이의 마음을 지금은 이슬의 시간이 서리의 시간으로 옮아가는 때 지금은 아직 이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11.25
강아지 똥 / 정원도 강아지 똥 / 정원도 약수터 길모퉁이 풀섶에 강아지 똥 몇 덩이 가만히 모셔져 있다 강아지를 사랑할 줄 모르는 여인들이 약수터로 강아지 데리고 산책 나왔다가 멀쩡한 강아지 허물만 회수해 가고 이쁜 그 속은 내버리고 간 것을 시퍼런 풀들이 온몸으로 이슬 적시며 고이 모시는 중인데..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11.25
황혼 이혼 / 정해영 황혼 이혼 / 정해영 흙먼지를 흠뻑 뒤집어쓰고 실핏줄 같은 오지의 산길까지 따라 다니던 여행 가방이 미끈하게 뻗은 도시의 길 한 복판에서 툭 벌어졌다 저장 식품처럼 갇힌 울분이 팽창하여 터져 버린 것이다 악취가 나는 못 볼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십 년을 동행했던 허름한 가방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11.25
금목서 향기 / 박명남 금목서 향기 / 박명남 마당 이쪽, 금목서 연주황 꽃 핀다. 샤넬 NO 5 향수보다도 그윽하게 출렁거린다. `당신의 마음을 끌다'라는 꽃말 따라 깊어가는 이 가을밤 훔치고 싶다. 저 작은 꽃송이에서 이토록 어지러운 향기가 나는 것은 정말 모를 일이다. 황홀한 향기 하나로 이 세상을 다 덮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