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 박남수(1918~94) 첫눈’ - 박남수(1918~94) 그것은 조용한 기도. 주검 위에 덮는 순결의 보자기. 밤 새워 땅을 침묵으로 덮고 사람의 가슴에, 뛰는 피를 조금씩 바래주고 있다. 개구쟁이 바람은 즐거워서 즐거워서 들판을 건너가고 건너오고 눈발은 바람 따라 기울기도 하지만, 절대의 침묵은 조용히 조용히 지붕 위에 .. 詩가 있는 아침 2009.12.24
기억제’-박주택(1959∼ ) 기억제’-박주택(1959∼ ) 저 저물녘 누워 있는 것들을 보라 파도는 출렁이고 노래는 물어물어 기억의 기슭에 닿는다 그리하여 철썩이고 철썩여 노래도 저물면 도시 저쪽에서는 이별한 자의 술잔과 빚에 쫓기는 고개들이 모여 간판으로 다시 태어나고 곱창집이며 호프집에는 밥과 술이 섞이듯이 강물 .. 詩가 있는 아침 2009.12.23
동짓날’- 김지하(1941~ ) 동짓날’- 김지하(1941~ ) 첫봄 잉태하는 동짓날 자시 거칠게 흩어지는 육신 속에서 샘물 소리 들려라 귀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샘물 소리 들려라 한 가지 희망에 팔만사천 가지 괴로움 걸고 지금도 밤이 되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날 뿐 아무것도 없고 샘물 흐르는 소리만 귀 기울여 귀 기울여 들려라. 한.. 詩가 있는 아침 2009.12.23
역(驛)’-김승기(1960∼ ) 역(驛)’-김승기(1960∼ ) 잎사귀 하나가 가지를 놓는다 한 세월 그냥 버티다 보면 덩달아 뿌리 내려 나무가 될 줄 알았다 기적이 운다 꿈속까지 따라와 서성댄다 세상은 다시 모두 역(驛)일 뿐이다 희미한 불빛 아래 비켜가는 차창을 바라보다가 가파른 속도에 지친 눈길 겨우 기댄다 잎사귀 하나 기어.. 詩가 있는 아침 2009.12.23
황태’ - 박기동(1953~ ) 황태’ - 박기동(1953~ ) 이번 생이 다할 때까지 얼마나 더 내 몸을 비워야 할까, 내 고향은 늘 푸른 동해 그리워 마지못해 내설악 얼음물에도 다시 몸을 담근다. 그리워 마지못해 내설악 칼바람에도 다시 내 몸을 늘인다. 이번 생을 마칠 때까지 얼마나 더 내 몸을 비워야 할까, 내설악 동장군 칼바람에 .. 詩가 있는 아침 2009.12.20
‘절정’-이육사(1904~44) ‘절정’-이육사(1904~44)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거리에 휘몰아치는 바람 매섭데요. 지.. 詩가 있는 아침 2009.12.18
‘버리긴 아깝고’-박철(1960~ ) ‘버리긴 아깝고’-박철(1960~ ) 일면식이 없는 한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서명한 뒤 잠시 바라보다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싶어 면지를 북 찢어낸 시집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여차여차하여 버리긴 아깝고 해서 주는 책이니 읽어나 보라고 며칠 뒤 비 오는 날 전화가 왔다 아.. 詩가 있는 아침 2009.12.18
‘푸른 가빠의 저녁’ -유홍준(1962~ ) ‘푸른 가빠의 저녁’ -유홍준(1962~ ) 다섯 개의 오뎅을 먹고 꼬챙이를 세고 구겨진 돈을 냈네 푸른 가빠는 쓸쓸하고 아늑하고 푸른 가빠는 왠지 국물처럼 서러워, 커다란 돌덩어리로 끄트머리를 눌러놓은 것 같은 청춘이 있었네 바람이 불면 그래도 들썽거리던 청춘이 있었네 푸른 가빠의 저녁 붉은 .. 詩가 있는 아침 2009.12.18
노숙(露宿)’-김사인(1955~ ) 노숙(露宿)’-김사인(1955~ )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 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 詩가 있는 아침 2009.12.15
탑’ -김창균(1966~ ) 탑’ -김창균(1966~ ) 올해가 끝이겠구나 하면 또 밀고 올라오는 것 자신을 모두 밀어 올려 가난의 끝에 까치발을 하고 서 보는 일 허리가 아프도록 서서 큰소리로 한 번 우는 것 세상의 슬픈 것들은 이다지도 높아 소리마저 절멸한 곳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난한 끝에 꽃 한 송이 피워 올리는 일 층층나무.. 詩가 있는 아침 2009.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