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가오리 / 이명윤 날아라 가오리 / 이명윤 자갈치역 지하도 납작 엎드린 등. 쏟아지는 눈길. 껌처럼 달라붙은 저 눈빛을 어디서 보았더라? 며칠 전 어시장 좌판, 큼직한 날개를 펼치고 엎드려 있던 더 할 말 없다는 듯 아랫배에 입을 숨기고 있던 가오리, 버스가 서지 않는 오지의 지명처럼 쓸쓸히 지나쳤던 그때 그 가-오..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1
제17회 전태일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제17회 전태일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고리 / 김후자 남자가 지하철에서 휴대용 접착고리를 판다 쉴 새 없이 상품을 선전하는 남자 스티커에 붙은 도금한 고리가 3kg 철근을 번쩍 들어올린다 그리고 다시 이를 앙다문 고리가 5kg을 들어올린다 제 덩치보다 몇 백 배 많은 쇳덩이를 번쩍번쩍 들어올리며 하.. 신춘문예 당선詩 2010.02.01
아파트가 운다 외 1편 / 최금진 아파트가 운다 외 1편 / 최금진 가난한 사람들의 아파트엔 싸움이 많다 건너뛰면 가닿을 것 같은 집집마다 형광등 눈밑이 검고 핼쑥하다 누군가는 죽여달라고 외쳤고 또 누구는 실제로 칼로 목을 긋기도 한다 밤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유체이탈한 영혼들처럼 기다란 복도에 나와 열대야 속에 멍..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1
물방울집 / 이인주 김유정 문학상 대상 물방울집 / 이인주 풀잎에 맺힌 이슬을 받거나 처마끝 낙숫물이 궁글린 물방울을 헤아리고 있으면 맑고 투명한 물방울집 속에 들어앉아 내가 둥근 알을 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부풀린 물방울로 지은 집 한 채가 있어 둥글고 온전한 방 속에 몸을 푸는 내가 안과 밖이 잘 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1
草蟲圖 / 이인주 草蟲圖 / 이인주 풀잎 아래 몸을 누인다 뼈 없는 통증이 편안하다 난생의 벌레인 나는 늘 웅크린 자의 등을 기억한다 내게 익숙한 모든 것들은 주름진 마디로 다가왔다 아버지가 그랬고 애인이 그랬고 생각이, 말이 그랬다 직립을 꿈꾸었으나 접히지 않을 만큼 독하지 못했다 낙오자로 채색된 길을 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1
허물 / 정호승 허물 / 정호승 느티나무 둥치에 매미 허물이 붙어 있다 바람이 불어도 꼼짝도 하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다 나는 허물을 떼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죽어 있는 줄 알았던 허물이 갑자기 몸에 힘을 주었다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허물의 발이 느티나무에 더 착 달라붙었다 허물은 허물을 벗고 날아간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1
사기꾼 이야기 / 정성수 사기꾼 이야기 / 정성수 한평생 나는 사기를 쳤네 언제나 추운 앞마당 내다보며 보아라, 눈부신 봄날이 저어기 오고 있지 않느냐고 눈이 큰 아내에게 딸에게 아들에게 슬픈 표정도 없이 사기를 쳤네 식구들은 늘 처음인 것처럼 깨끗한 손 들어 답례를 보내고 먼지 낀 형광등 아래 잠을 청했지 다음날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1
쥐똥나무를 읽다 / 안영희 쥐똥나무를 읽다 / 안영희 양귀비 같은 봄날이라, 목마름도 흠뻑 바람조차 그만이라 덩달아 쑤욱쑥 하늘로 깃발을 흔들어서는 안 되지 자작나무 버드나무 미루나무 나무나무나무 목욕 끝낸 후 풀어헤친 머릿단들 봄볕의 흰 손가락 애무하는데 자를 댔었나 봐 수평도 저리 반듯하게 산목숨을 친 직각..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1
저기 저 붉은 꽃잎 / 이영선 저기 저 붉은 꽃잎 / 이영선 지난 봄 옻칠한 식탁 앞에는 네 개의 의자들이 묵언수행 중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너른 식탁 등 뒤에 두고 개수대 앞에 서서 밥을 먹기 시작한 것이 찬도 별반 없이 우적우적 씹는 이것이 밥인지 쓸쓸함인지 영치금 같은 밥덩이를 삼키며 얼마나 자주 목이 메었는지 북쪽머리..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1
봄의 줄탁 / 도종환 봄의 줄탁 / 도종환 모과나무 꽃순이 나무껍질을 열고 나오려고 속에서 입술을 옴찔옴찔 거리는 걸 바라보다 봄이 따뜻한 부리로 톡톡 쪼며 지나간다 봄의 줄탁 금이 간 봉오리마다 좁쌀알 만한 몸을 내미는 꽃들 앵두나무 자두나무 산벚나무 꽃들 몸을 비틀며 알에서 깨어나오는 걸 바라본다 내일은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