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붓꽃 / 나종영 노랑붓꽃 / 나종영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 작은 풀이파리 만한 사랑 하나 받고 싶었을까 나는 상처가 되고 싶었네 노란 꽃잎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병든 몸이 뜨거워지고, 나는 사랑이 곧 상처임을 알았네 지난 봄 한철 햇살 아래 기다림에 몸부림치는 네 모습이 진정 내 모습임을 노랑붓꽃 피어 있는 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10
작약이 피는 동안 / 손순미 작약이 피는 동안 / 손순미 붉은 비단처럼 요요한 작약이 핀다 이까짓 것! 어머니는 댕강댕강 작약의 목을 친다 밭고랑에 작약의 머리통 흥건하다 또, 지랄이야! 아버지의 화려한 정원은 끔찍한 현장이고 날씨는 환장하겠다 들판을 타고 산을 타고 천지사방 작약을 타던 어머니가 고질적인 혁명을 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10
플루트 / 최형심 플루트 / 최형심 정오를 털고 새들이 날아오른다. 비 그친 오후가 나의 등을 부욱 찢으면, 그는 능숙하게 머리와 발목을 몸통에 끼운다. 발목까지 숨이 차오르면, 음표를 빼곡하게 받아 적은 발자국들이 팔랑팔랑 넘어간다. 이제, 나는 익숙한 그 남자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앙상한 갈비뼈를 더듬는 손..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10
연립방정식 외 1편 / 하명환 연립방정식 외 1편 / 하명환 내 삶은 정답 없는 3원1차 연립방정식 산다는 게 뭔가는 X 내 존재의 의미는 Y 이외 우수마발의 생활은 Z 사유로 구하는 이 문제풀이는 生의 시험지에 옮겨 쓴 답안 꼭 그 시험지가 누렇게 뜰 때가 아니더라도 참으로 어느 교교한 시간이 흐른 후의 지금처럼 그때도 내 無慾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10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 이명윤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 이명윤 내 마음의 강가에 펄펄, 쓸쓸한 눈이 내린다는 말이다 유년의 강물냄새에 흠뻑 젖고 싶다는 말이다 곱게 뻗은 국수도 아니고 구성진 웨이브의 라면도 아닌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나 오늘, 원초적이고 싶다는 말이다 너덜너덜 해지고 싶다는 뜻이다 하루하루 달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04
은행나무 / 오명선 은행나무 / 오명선 잎잎이 기록된 푸른 햇살이여 이제 안녕! 펄럭이던 해와 바람의 일기장에서 삭제되었다 낡고 지루한 사랑과의 이별은 조이던 스카프를 풀어낸 헐렁한 목이다 파장한 장터의 풍경처럼 내 손금을 벗어난 전생처럼 슬하는 오히려 풍요롭다 파산한 내 집을 구경하는 나는 낯선 관객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04
카지아도 정거장 / 황학주 카지아도 정거장 / 황학주 비 오는 날 바오밥나무 하나만으로 정거장이 되는 모두 점점이 떨어져가고 나 혼자만으로 한 밤기차가 되는 그러한 외로움을 내가 지나간단 말인가 비가 다 들이치는 창 없는 한 칸을 어항에 든 물레방아 같은 집 저 작은 돌집에 기름 불빛을 심고 모조리 배 고프도록 기다리..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01
시월역(驛) / 손순미 시월역(驛) / 손순미 지네처럼 스르륵 기차가 오네 수수밭머리 새떼들 북천(北天)의 바다를 저어가고 벤치의 늙은이 지친 얼굴에 수고했다 수고했다 석양이 햇빛연고를 따뜻하게 발라주는 가을, 당신은 보이지 않고 우물쭈물 안경을 떨어뜨리는 사이 기차는 떠났네 돌아올 것이다 돌아올 것이다 오지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01
내가 사는 계절 / 김은자 내가 사는 계절 / 김은자 여름이 채 떠나기도 전 귀뚜라미 한 마리 싱크대 밑으로 스며들어 밤마다 운다 여름내 더운 국수를 끓여내던 부엌에는 귀뚜라미 울음이 앞치마처럼 걸려있고 가장 어두운 곳에 뿌려진 울음 하나 나는 가을 옷을 입고 낙엽 밟는 소리로 밥을 짓는다 사르륵 사르륵 밥 짓는 연기..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01
어머니의 채소밭 / 신병은 어머니의 채소밭 / 신병은 가난했던 시절 어머니의 채소밭은 소박하지만 늘 등 푸른 긍정의 이랑이었다. 작은 개울물을 먹고 자란 고추며 부추며 상추며 우엉이며 호박잎이며 가지며 오이며… 아침 저녁으로 어머니의 채소들은 정성과 애정 속에 자랐었다. 반찬투정을 하는 우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