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 검은 구멍/고진하 느티, 검은 구멍/고진하 수령(樹齡) 300년은 됨 직한 느티나무, 텅텅 튀는 농구공 대여섯 개쯤 들어갈 허리께에 난 저 검은 구멍에 개미들이 들락거린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왕국 하나쯤은 너끈히 건설할 수 있겠지. 다람쥐나 청설모가 한 뼘 꼬리를 낮추고 드나든다면, 동네 텃새들이 짹짹거리며 날아..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21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 서정주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 서정주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날 마다 칠해져 온 곳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 많이 문..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21
기차/안도현 기차/안도현 삼례역에서 기차가 운다, 뽕뽕, 하고 운다, 우는 것은 기차인데 울음은 멀리까지 번지게하는 것은 철길이다, 늙은 철길이다 저 늙은 것의 등뼈를 타고 사과 궤짝과 포탄을 실어 나른 적 있다 허나, 발갛게 달아오른 기관실을 남쪽 바닷물에 처박고 식혀 보지 못했다 곡성이며 여수 따위 목..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21
사루비아 / 신현정 사루비아 / 신현정 꽃말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사루비아에게 혹시 병상에 드러누운 내가 피가 모자랄 것 같으면 수혈을 부탁할 거라고 말을 조용히 건넨 적이 있다 유난히 짙푸른 하늘아래에서가 아니었는가 싶다 사루비아, 수혈을 부탁해. '현대시학' 2009년 11월호 투병 중 병상에서 쓴 유고시로 사루..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21
나무를 낳는 새 / 유하 나무를 낳는 새 / 유하 찌르레기 한 마리 날아와 나무에게 키스했을 때 나무는 새의 입 속에 산수유 열매를 넣어주었습니다 달콤한 과육의 시절이 끝나고 어느 날 허공을 날던 새는 최후의 추락을 맞이하였습니다 바람이, 새의 육신을 거두어 가는 동안 그의 몸 안에 남아 있던 산수유 씨앗들은 싹을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21
콘돔 전쟁 / 손택수 콘돔 전쟁 / 손택수 걸프전 때도 그랬고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도 그랬다 사막에서 전쟁이 시작되면 콘돔 회사 주가가 껑충 뛰어오른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막이용 총구덮개로 콘돔이 힘을 쓰기 때문이다 주도면밀한 강간범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총열에 덮어씌운 콘돔 드르륵 드르륵 교성을 지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21
구름의 노래 / 유장균 구름의 노래 / 유장균 한 생애의 욕망과 좌절은 결국 여기에 와서야 조용히 만나 갈등을 풀었다 덜컥 관이 멈추고 따라 들어갔던 시선들이 하릴없이 다시 이승으로 되돌아와서 비로소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풀잎을 흔드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산이 몇 번 꿈틀꿈틀 잠자리를 흔들다가 편안한 자세로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21
죽선 / 허영숙 죽선 / 허영숙 속없어 보여도 저미면 뼈가 여럿입니다 뼈와 뼈를 선지(扇紙)로 묶으면 서늘한 숲이 생기지요 한여름의 폭염 그 후방에 나 앉아 포개진 댓살을 펼쳐 흔들면 숲에서 찬바람이 일제히 몰려오는 것인데 그럼 바람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지 허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요한 듯 보여도 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21
아르바이트 소녀 / 박후기 아르바이트 소녀 / 박후기 나는 아르바이트 소녀, 24시 편의점에서 열아홉 살 밤낮을 살지요 하루가 스물다섯 시간이면 좋겠지만 굳이 앞날을 계산할 필요는 없어요 이미 바코드로 찍혀 있는, 바꿀 수 없는 앞날인 걸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봄이 되면 다시 나타나는 광장의 팬지처럼, 나는 아무도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21
다시 분꽃은 피고 / 하명환 다시 분꽃은 피고 / 하명환 앞마당 분꽃들은 감나무 까치밥 몰골이 됐다 어머니는 며칠 동안 아버지에게 분꽃타령을 앙칼지게 해댔다 나는 매년 그런 아버지 행동이 어이없어 캐묻고 싶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불호령만 머릴 맴돌아 꾹 참았다 크고 작은 일곱 행성의 태양에게 뒤꼍 해바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