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는다는 것에 대한 명상 / 신병은 썩는다는 것에 대한 명상 / 신병은 두엄을 져 내면 거기 속 썩인 흔적 환하다 팽개쳐진 것들의 잃어버린 꿈과 상처 난 말들이 오랫동안 서로의 눈빛을 껴안고 견뎌낸 시간, 맑게 발효된 생의 따뜻한 소리가 있다 곁이 되지 못한 시간의 퇴적 속에서 헐어진 채로 낯선 외출을 준비하는 겨울 묵시록, 아직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01
깊고 푸른 길 / 이구락 깊고 푸른 길 / 이구락 사천만 개펄 속엔 먼 가야시대 토기 묻혀 있다 천 년 동안 곰삭아, 저녁노을에 농익어 토기는 짙은 적갈색이다 수석인들이 고기석(古器石)이라 부르는, 사천만 종포리 개펄 속의 돌이다 종포리 늙은 어부의 집, 바다가 멀리 물러서고 개밥그릇에 노을 혼자 남아 오래 저물고 있다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01
기자(奇字)의 땅 / 김성수 기자(奇字)의 땅 / 김성수 탁발 나선 스님의 행보를 따르는 듯 달을 품은 산동네 어두워지면서 가등의 불빛이 손을 잡고 글씨를 써간다 간혹 대문에 걸린 방점傍點의 안쪽에선 생가지 타던 매운 눈물에 땟국 절은 얼굴들이 삐걱이는 대문 소리에도 곡을 했다 태엽을 감아도 목 쉰 울음만 토해내는 새,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01
나는 유배를 꿈꾼다 / 김성수 나는 유배를 꿈꾼다 / 김성수 나는 가끔 포동포동한 돼지들이 품으로 파고드는 나태해진 일상의 건널목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유배를 꿈꾼다. 목에 칼을 차고 풀어진 정신을 주리 틀며 강원도 어느 너와집에서 배틀질하며 천이란 천마다 쪽물, 감물, 치자물 들여 널어놓고는 아라리 한 가락 목..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01
붉은 웃음 / 김우진 붉은 웃음 / 김우진 3호선 전철 안이 확 달아올랐다 북한산 산행을 마치고 막 하산한 왁자한 웃음이 붉다 북한산을 전철까지 끌고 온 등산객들, 온몸에 붉은 산물이 들었다 왼 종일 산그늘에 앉았다 온 사람들, 도토리묵에 막걸리를 마시고 단풍잎보다 더 불콰하다 지하철로 들어선 가을이 승객의 무릎..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01
봄날, 하동/ 이종암 봄날, 하동/ 이종암 매화 피고 나니 산수유 피고 또 벚꽃이 피려고 꽃맹아리 저리 빨갛다 화개(花開) 지나는 중 꽃 피고 지는 사이 내 일생의 웃음도 눈물도 행行, 다 저기에 있다 시집<몸꽃>2010.애지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01
몸꽃 / 이종암 몸꽃 / 이종암 -차근우 오어사 뒷마당 배배 뒤틀린 굵은 배롱나무 뇌성마비 1급 지체장애자 영호 형님 작은 아들 차근우 같다 말도 몸도 자꾸 안으로 말려들어 겨우 한마디씩 내던지는 말과 몸짓으로 차가운 세상 길 뚫고 나가 뜨거운 꽃송이 활활 피워 올리는 나무 푸른 대나무가 온몸의 힘 끌어 모아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01
포도밭이 있는 마을 / 전명숙 포도밭이 있는 마을 / 전명숙 원래 이 마을은 포도밭이었네. 포도밭을 갈아엎은 뒤 포도나무는 사라졌지만 뿌리의 기억은 지금도 살아있네. 포도넝쿨은 틈만 나면 집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네. 바닥으로 천장으로 기어나온 넝쿨손 잡아당겨 노란 줄무늬 무당거미가 몇 겹의 덫을 놓네. 아무도 몰래 피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01
이제 꽃피면 안되겠다 / 이성목 이제 꽃피면 안되겠다 / 이성목 소파가 꽃을 피우려는지 인조 가죽이 여러 갈래로 튼다. 갈라진 틈새로 노란 스펀지가 올라온다. 의자는 몇 해 전에 이미 꽃을 피웠다. 굵고 탄력 있는 스프링 꽃대가 아직도 등받이 근처 등뼈처럼 구부정하다. 아버지는 담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암은 어느 꽃의 구근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9.01
나이테 / 서화 나이테 / 서화 가뭄으로 저수지 바닥이 드러났다 뽀얗게 말라버린 가장자리를 짚으며 내려오는 산그늘 악물었던 이빨을 풀고 처박힌 냉장고를 기웃댄다 일그러진 문짝을 가리겠다고 수초들 힘껏 팔 뻗는데 멀리서 주위를 맴도는 왜가리들 냉동실에 떠다니는 물고기들을 살핀다 너무 오래 갇혀 있었다..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