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과 반 / 백상웅 반과 반 / 백상웅 거기를 지날 때마다 나는 반반을 고민한다. 간판에는 장의사라고 반듯하게 박혀있고 미닫이문에는 영어로 드럼렛슨이라 적힌, 거기는 낡았지만 웃긴 구석이 있다. 관을 짜는 사람과 드럼을 두드리는 사람이 한 건물에 다른 집기를 들여 놓고는 한 사람이 염을 할 때, 한 사람은 스틱..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7.28
낙화를 따라가다 / 권운지 낙화를 따라가다 / 권운지 한 남자가 강물에 투신하였다고 아침 뉴스가 전한다. 뉴스를 전하는 화면 속으로 벚꽃 눈부신 봄이 강물처럼 출렁이며 지나간다. 그 남자의 지난했을 생애가 간단명료하게 자막으로 처리 되었다.낙화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작은 파문도 일으키지 않았다.벼랑까지 떠밀려와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7.28
아버지가 이르신다 / 맹문재 아버지가 이르신다 / 맹문재 마을 이장이 농자금 추천을 자기편 사람들만 한다고 이르신다 중풍때문인지 손발이 뻣뻣하다고 이르신다 시제가 제대로 안된다고 이르신다 다 캐지않은 도라지밭을 땅 주인이 갈아엎었다고 이르신다 올해는 감나무가 시원찮다고 이르신다 날이 가물어 큰일이라고 이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7.28
믹서 / 김영미 믹서 / 김영미 원산지에 따라 생육사가 다른 각양각색의 과일들 믹서에 넣는다 스위치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 격동의 한 세기가 몰려온다 굉음을 울리며 칼날의 검은 회오리 속으로 빨려든다 꿈결처럼 빨강과 초록, 극좌와 극우가 손을 잡고 주황과 연두, 중도와 보수가 섞인다 과육 속 붉게 영근 따가..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7.28
순장 / 안효희 순장 / 안효희 그 속엔 장롱과 냉장고와 세탁기도 있지, 나의 사랑과 나의 궁핍과 나의 파열도 있지 꼬리를 단 시간이 재깍거리고, 날짜들이 깃발처럼 벽에 걸려 펄럭거리지, 건너편 고층빌딩이 통유리 넓은 창으로 24시간 들여다보지 행복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는 것들로 점점 배가 불러지면, 아치형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7.28
病 / 정진경 病 / 정진경 아버지 주려고 담근 오디주 발효되기도 전에 아버지가 사라졌으므로 뚜껑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잃어버렸다 아버지는 오디주 병 안에 밀봉되어 버렸고 아버지와 함께 순장된 오디를 나는 죽음이라 생각했다 존재할 의미를 상실했다고 생각한 어느 날 오디주 붉은 핏줄이 술병을 타고 오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7.28
울며 사과 먹기 / 오명선 울며 사과 먹기 / 오명선 윗집에서 일방적으로 보내온 사과상자 이건 사과가 아니다 밤마다 내 잠 속을 콩콩 뛰어다니는 어린 캥거루의 발목 쿵쿵쿵 주방으로 욕실로 돌아다니는 하마의 엉덩이 사과도 아닌 것이 사과 이름표를 달고 사과 흉내를 내며 사과인 척 공손하다 입만 열면 뻔한 변명, 뻣뻣한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7.28
우람한 남근 / 이건청 우람한 남근 / 이건청 사람아 나는 지금 6천년전쯤 부터 이 골짜기에 살고 있는 당신을 만난다 살아있는 당신을 만난다 당신이 서 있는 암벽과 내가 지금 서 있는 시간이 함께 늦 가을 비에 젖는다 당신과 내가 비에 젖는다 당신이 서 있는 쪽에서 북소리가 울린다 두 손을 모두어 신을 부르는가, 힘센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7.28
먼지흡입열차 / 최승호 먼지흡입열차 / 최승호 지하철 운행이 모두 끝난 한밤중 캄캄한 지하에서 캄캄한 지하로 먼지 흡입열차가 웅웅거리며 돌아 다닌다 아무도 없는 철길에 널려있는 쇳가루와 먼지와 케케묵은 침묵 그것들을 힘차게 빨아들이며 고독한 기관사가 어둠속을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는 타클라마칸 사막에..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7.28
음악 / 홍신선 음악 / 홍신선 군포에서 의왕 구간 전철안에서 소리 짓씹히는 기아바이 행상꾼 녹음기 릴테이프에서 그가 덜컥덜컥 튀어나온다 그의 값없는 음악 삶치고 허망한 행상꾼들 아닌 자 있으랴 고3 시절 진학포기하고 밴드부에 혼자 남아 중고짜리 트럼벳만 자랑스럽게 불던 지방 방송국 경음악단 한 구석..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