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테 / 이종섶 나이테 / 이종섶 저 호수에 누가 돌을 던지고 갔는지 파문이 끊이질 않는다 딱딱한 껍데기로 울타리를 치고 감추려 하지만 중심에 박힌 돌이 일으키는 물결을 막지는 못한다 예민한 속살이 돌에 스칠 때마다 가지가 흔들리고 나뭇잎이 떨린다 햇볕이 들고 바람이 스치고 새들이 앉는 건 달빛과 별빛이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8.23
결 / 이정록 결 / 이정록 철물점에 갔다가 톱날 묶음을 보았다 톱니들이 물결처럼 보였다, 손을 대면 물방울이 튀어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톱날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누군들 자르는 일에 몸담고 싶으랴 톱날을 어루만지며, 나는 얼음집에 가면 톱으로 엉킨 물을 푼다고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8.23
우수 2009 / 정미정 우수 2009 / 정미정 비에 포박당한 도시는 이제야 차분해졌다 오리무중이던 사건을 곧 실토라도 할 듯 자분자분 다그치는 비 앞에 도시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왔다 다소 고무적이다 도시 남동쪽에서 아기 분 냄새를 맡았다는 진술과 한때 개나리 아랫도리가 젖어있더라는 진술을 들이대자 담배 한 개비..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8.23
밀착密着 / 권현형 밀착密着 / 권현형 한때 나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숨죽여 울곤 했다 서둘러 폭삭 늙어버리고 싶었다 슬픔도 폭삭 늙어버릴 줄 알았다 까무룩 혼절할 듯 높이 나는 새를 향해 셔터를 누르자 해가 툭 떨어진다 사라진 비행기처럼 잔해조차 없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한꺼번에 검어진 섬의 숲을 찍고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8.23
아프니까 그댑니다 / 이정록 아프니까 그댑니다 / 이정록 암에 걸린 쥐 앞에 열두 씨앗 놓아둡니다 성한 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씨알 쪽으로 병든 쥐가 시름시름 다가가 그러모읍니다 오물오물 독경하듯 앞발로 받듭니다 병든 어미 소를 방목합니다 건강한 소들은 혀도 디밀지 않는 독풀 젖통 출렁이며 허연 혀로 감아챕니다 젖..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8.23
기하학적인 삶 / 김언 기하학적인 삶 / 김언 미안하지만 우리는 점이고 부피를 가진 존재다. 우리는 구이고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멀어지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변함없는 크기를 가진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칭을 이루고 양쪽의 얼굴이 서로 다른 인격을 좋아한다. 피부가 만들어 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8.23
진경산수(眞景山水) / 성선경 진경산수(眞景山水) / 성선경 자식이라는 게 젖을 떼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새끼라는 게 제 발로 걸어 집을 나가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시도 때도 없이 -아버지 돈 그래서 돈만 부쳐주면 다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글쎄 어느 날 훌쩍 아내가 집을 나서며 -저기 미역국 끓여 놓았어요 -나 아들에게 갔다 오겠..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8.23
섬 / 복효근 섬 / 복효근 파도가 섬의 옆구리를 자꾸 때려친 흔적이 절벽으로 남았는데 그것을 절경이라 말한다 거기에 풍란이 꽃을 피우고 괭이갈매기가 새끼를 기른다 사람마다의 옆구리께엔 절벽이 있다 파도가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이 가파를수록 풍란 매운 향기가 난다 너와 내가 섬이다 아득한 거리에서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8.23
오징어 살인 사건 / 방수진 오징어 살인 사건 / 방수진 -메트로 PC방 쟁반위에 마른 오징어가 살갗을 그을린 채 죽어있다 다리 하나 찢어 씹을 때마다 오징어의 한 시절을 떠올린다 매끈한 피부 대신 얼룩만이 남은 너는 한때, 넥타이를 매고 건물을 신나게 헤엄쳤을 것이다 매회 진급 사원 후보 명단에 네 이름이 기록되었고, 아..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8.23
노끈 / 이성목 노끈 / 이성목 마당을 쓸자 빗자루 끝에서 끈이 풀렸다 그대를 생각하면 마음의 갈래가 많았다 생각을 하나로 묶어 헛간에 세워두었던 때도 있었다 마당을 다 쓸고도 빗자루에 자꾸 손이 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마른 꽃대를 볕 아래 놓으니 마지막 눈송이가 열린 창문으로 날아들어 남은 향기..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