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장 / 안효희 순장 / 안효희 그 속엔 장롱과 냉장고와 세탁기도 있지, 나의 사랑과 나의 궁핍과 나의 파열도 있지 꼬리를 단 시간이 재깍거리고, 날짜들이 깃발처럼 벽에 걸려 펄럭거리지, 건너편 고층빌딩이 통유리 넓은 창으로 24시간 들여다보지 행복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는 것들로 점점 배가 불러지면, 아치형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7.15
病 / 정진경 病 / 정진경 아버지 주려고 담근 오디주 발효되기도 전에 아버지가 사라졌으므로 뚜껑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잃어버렸다 아버지는 오디주 병 안에 밀봉되어 버렸고 아버지와 함께 순장된 오디를 나는 죽음이라 생각했다 존재할 의미를 상실했다고 생각한 어느 날 오디주 붉은 핏줄이 술병을 타고 오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7.15
한 컵의 안간힘 / 허영숙 한 컵의 안간힘 / 허영숙 마디는 뿌리의 안간힘이다 대를 잘라내고 남은 미나리 뿌리를 컵에 담아두었더니 여린 대가 새로 올라온다 한 컵의 물에 뿌리를 두고 안간힘을 다해 잘려나간 마디를 파랗게 세우고 있다 컵의 물을 숫돌에 뿌려가며 한 손으로 칼을 갈고 있는 남자,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가 뭉..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15
내 고향집에 가네 / 김현주 내 고향집에 가네 / 김현주 희미한 인기척에도 고샅까지 들리는 개 짖는 소리에 소루쟁이 아기똥풀 쇠비름 강아지풀들이 어깨 들썩이며 달려 나오는 고향집, 짙푸른 대숲 너머 창백하게 내려앉는 먹구름은 폐병쟁이 젊은 아재가 마늘 구워 먹던 사랑채에 한참을 머무르고 핏빛 노을 속, 그을음이 까맣..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15
빨랫줄 / 서정춘 빨랫줄 / 서정춘 그것은, 하늘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 줄 같다 그것은,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15
엉거주춤 / 김신영 엉거주춤 / 김신영 당신은 엉거주춤에 대해 아시나요? 다섯 시라는 시간에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어디에서 엉거주춤거리며 세상을 둘러보는 춤인데 말이죠 저녁에서 아직 밤이 오기 전의 시간에 엉거주춤 한 허리 부여잡고 애쓰며 걸어가는 춤 오후에서 저녁으로 이어지는 짧은 시간 사이 고전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15
주홍단추 / 이은채 주홍단추 / 이은채 방사선과 탈의실 구석에 잠시나마 누군가의 체온을 실었던 가운들이 허물처럼 수북이 쌓여 있다 외투를 벗어 걸다 말고 블라우스 두 번째와 세 번째 단추 사이에 슬며시 손을 밀어넣는다 다가와 고요히 안기는 젖무덤 한때 터질 듯 팽팽하게 끓어오르던 시절이 있었겠다 앞자락에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15
흑싸리꽃 / 이은채 흑싸리꽃 / 이은채 정형외과 대기실에서 문득, 그의 부음을 본다 무심코 넘기던 조간신문 행간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름 살아 감히 끼어 들 수 없는, 두 번 다시 기록될 수 없는 부음난 분분, 흑싸리꽃 폈다 주검은 이렇듯 한순간에, 흑싸리껍데기로 발견되는 걸까 참 낯선, 그의 이름을 축으로 부옇게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15
달콤한 팥죽 / 김신영 달콤한 팥죽 / 김신영 동지섣달 팥죽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아니, 아버지가 팥죽을 끓이면 모든 계절이 동지섣달 깊은 밤이 되었다 젊은 날 노동판에서 굵어진 손마디와 굳어진 어깻죽지가 제일 좋아하였다 무좀 걸린 발가락과 버거운 다리가 더욱 좋아하였다 나의 어린 시절, 어머니는 세상에서 아버..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15
호랑거미 역사책 / 정연희 호랑거미 역사책 / 정연희 호랑거미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이다 그는 가늘고 질긴 실로 짠 둥그런 천을 올리브가지 사이에 내걸었는데 씨실과 날실의 간격이 일정한 흰 비단 천이다 호랑거미가 그 천위에 엎드려 사초史草를 쓰고 있다 물감을 찍어서 세필로 깨알처럼 써내려갔다 햇살을 받은 글..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