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꽃 / 유정이 그늘꽃 / 유정이 저 골몰한 것들 한 곳으로만 가는 것들 스무 살의 오월같이 타닥타닥, 피는 일에 골몰한 봄꽃들 저렇게 제 몸 피워본 날들 새삼스럽다 나는 키워지지 않은 아이 재배되지 않은 꽃이었다 지나는 봄비에 하르르 몸 지고 목 꺾였지만 아무도 내 벗겨진 아랫도리 덮어주지 않았다 꽃잎보다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5.15
선인장 꽃기린 / 유정이 선인장 꽃기린 / 유정이 꽃이란 꽃은 모두 스스로 쥐어짠 상처라는군 꽃이 웃고 있다고 믿는 건 오해라는군 가만히 보면 곧 울어버릴 것 같은 게 꽃의 얼굴이 아니냐구! 만개하는 울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서둘러 입을 닫느라 몸에 돋은 가시들 그 상처의 소리 들리네 누군가 남겨 놓고 간 쓰디쓴 서..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5.15
숲을 명명한다 / 이은환 숲을 명명한다 / 이은환 초록은 숲의 과잉이다 그래서 아무도 그 숲을 본 적이 없다 초록이 숲의 경계를 차츰 지우는 저녁이 오면 숲은 자욱한 제 어둠의 밀도를 본다, 숲은 그 때 조금씩 옮겨 앉는다 숲이 움직인다는 건 길을 잃어본 새들만 아는 일이다 거기서 자주 볼 수 있는 일 중에는 당신도 있다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5.15
낙타의 눈물 / 정진희 낙타의 눈물 / 정진희 사막의 지도를 완성한 것은 낙타의 눈물이다 유목민들은 죽은 자의 표식을 위해 낙타의 목을 내려쳤다 더운 피가 모래 알갱이를 적시면 십 리 밖에서도 어미는 새끼의 죽음을 알아차린다 사막 밑으로 흐르는 길은 지워지지 않는다 붉은 가슴을 받아들인 땅 위로 낙타는 제 길을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5.15
앞니 / 김진기 앞니 / 김진기 단단하던 내 집 대문이 돌풍에 떨어져 나갔다 바람은 소리치며 안방까지 몰려온다 시린 바람이 내 가슴을 때린다 감출 것도 빼앗길 것도 없는 살림이지만 그래도 대문이 없으니 불안하다 함께 살며 정든다는 것 떠나지 않고 내 기억의 뒤안을 서성이는 저 서랍 속 부러진 앞니 두개 어릴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5.15
왼쪽 통증 / 문정영 왼쪽 통증 / 문정영 목양체질은 왼쪽이 약하다는 글을 읽은 다음부터 왼쪽 무릎 왼쪽 어깨에 통증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잊어버린 시간 빼고는 시름이 자주 한쪽으로 오곤 했습니다 의식 없이 부른 이름이 오래 마음 안에 있었다는 증거는 그 이름 부른 뒤 마음 한 편이 아련해지는 것입니다 그렇..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5.15
두레박 / 정겸 두레박 / 정겸 낙안읍성 민속마을 낮은 우물둥치에 물기를 잃어버린 두레박이 땡볕을 끌어안고 누워있다 동행자도 없는 동굴 속을 하루에도 몇 십번씩 수직의 선을 그으며 외롭게 살아왔지만 그는 많은 비밀을 가졌다 여인들은 하루가 열리고 닫힐 때마다 귓가에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 놓고 가버렸다..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5.15
첫나들이 / 이수산 첫나들이 / 이수산 솔방울만한 새끼 원앙 열두 마리 떨어질세라 어미 물결을 발목에 휘감고 동실동실 첫나들이 고갯짓 바쁘다 장난치며 어미 곁을 맴도는 저 궁둥이 창경궁 못이 환하게 출렁인다 애기 눈꺼풀같이 얇은 물갈퀴는 알고 있다 머잖아 어미 따라 날 수 있다는 것을 뒷짐 지고 따라가는 대장..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5.15
씀바귀 꽃 / 김해화 씀바귀 꽃 / 김해화 요러케 크대먼 아그가 어찌게 애기다요 반 차비 내시오 핵교도 안 댕긴디 뭔 차비를 낸다요 반 차비 내랑께라 아직 애기랑께 그러네 및 학년이냐 나 학교 안 댕개라 집 나서 신작로까지 걸어나오며 어머니 내 귀에 못 박았지 나는 아직 학교 안 댕기는 이학년 옥신각신 내릴 곳 한참..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30
기록 / 송찬호 기록 / 송찬호 대체 서기(書記)된 자의 책무란 얼마나 성가신 일인가 언젠가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코끼리 떼를 흰 종이 위로 건너오게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숫자, 나이와 성별, 엄니의 길이와 무게, 무리의 지도자 습성, 이동 경로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들의 길고 주름진 코로 노획한 물건들 ㅡ..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