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마 / 최승헌 참마 / 최승헌 양평 절에서 마 몇 뿌리를 얻어왔다 아침에 밭에서 캔 참마라며 비닐봉지를 건네주는데 작고 못생긴데다 흠집이 많았다 참마라면 모양도 매끈하고 깨끗할 줄 알았는데 썩은 고구마처럼 흠집투성이다 선뜻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몸에 좋다며 갈아먹으라는 스님의 정성에 받아와 며..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30
그녀가 파업한 이유/ 이선 그녀가 파업한 이유/ 이선 한 남자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부음이다 돈벌이 없어도 아내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한평생 동고동락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훌훌 귀향길에 올랐다 세상의 남자들은 아내만 보면 밥통으로 보이는지 -밥 줘. 밥 줘 하다가 밥지기 아내에게 파업을 하라 한다 파업을 축하하는..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30
드라이 플라워 / 문인수 드라이 플라워 / 문인수 마음 옮긴 애인은 빛깔만 남는다. 말린 장미·안개꽃 한 바구니가 전화기 옆에 놓여 있다. 오래, 기별 없다. 너는 이제 내게 젖지 않아서 손 뻗어 건드리면 바스러지는 허물, 먼지 같은 시간들. 가고 없는 향기가 자욱하게 눈앞을 가릴 때 찔린다. 이 뾰족한 가시는 딱딱하게 굳..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4
술빵 냄새의 시간 / 김은주 술빵 냄새의 시간 / 김은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4
장마 속의 잠 / 길상호 장마 속의 잠 / 길상호 한 바가지 남은 쌀을 쏟아놓고 쌀벌레 골라내는 어머니, 제발 저의 꿈틀대는 몸은 집어내지 마세요 시간을 까먹고 또 파먹어도 푹 꺼져버린 배를 채울 수 없어 쌀로 만든 집 필요했던 거에요 아직 날개 돋지도 않았는데 이제 겨우 단꿈 씹고 있는데 어머니 시커먼 손가락이 닿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4
봄날 / 이수지 봄날 / 이수지 기타를 치고 싶었다. 일어도 배우고 싶었다. 장래 희망 란에는 언제나 디자이너라고 적어 넣었다. 우리 집 가장은 소주병과 약봉지였다. 삼청교육대에서 씀바귀 같은 절망을 키우고 돌아온 아버지는 어느 날 소주병이 되어 세상 밖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정부보조금으로는 뇌종양에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4
무량법회 / 이홍섭 무량법회 / 이홍섭 오늘은 큰 법당 대들보를 올리는 날 아침부터 노보살들이 산길을 오르는데 하나같이 다리가 성치 않다. 한발을 옮길 때마다 뼈마디 뼈마디에서 터져 나오는 한숨과 한숨 저 성근 다리로 자식을 낳고, 업고 기르고 지아비의 밥상을 나르고 늙으신 부모님과 또한 언제나 늙으신 부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4
너무 멀리 와 있네 / 임영조 너무 멀리 와 있네 / 임영조 어딘가에 떨어뜨린 단추처럼 어딘가에 깜박 놓고 온 우산처럼 도무지 기억이 먼 유실물 하나 찾지 못해 몸보다 마음 바쁜 날 우연히 노들나루 지나다 보네 다잡아도 놓치는 게 세월이라고 절레절레 연둣빛 바람 터는 봄 버들 그 머리채 끌고 가는 강물을 보네 저 도도하게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4
반달 / 이성선 반달 / 이성선 반은 지상에 보이고 반은 천상에 보인다 반은 내가 보고 반은 네가 본다 둘이서 완성하는 하늘의 마음꽃 한 송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4
겨울옷, 내 보풀들 / 조정 겨울옷, 내 보풀들 / 조정 솔기를 털고 주름을 편 옷들이 씨앗 봉지처럼 가지런하게 어둠 속으로 돌아간다 묵은 먼지가 빛을 피해 앉는다 나도 겨우내 샛길을 따라왔다 되도록 따뜻하게 웃었지만 되도록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낮은 지붕들 사이에서 하늘이 내려다보았다 많은 옷이 나를 가리지 못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