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 황상순 배꼽 / 황상순 과도로 사과의 배꼽을 파내다가 돌연 아랫배가 욱신거린다 맹장은 떼어낸 지 오래, 누가 칼을 곧추 세워 내 배꼽을 도려내는 것은 아닐까 그래, 나는 아주 오래 잊고 지냈다 꽃이 떨어진 자리 굳은 상처 배꼽은 더 이상 자라는 것이 아니어서 무럭무럭 커가는 열매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23
목련, 色을 쓰다 / 최재영 목련, 色을 쓰다 / 최재영 백목련 환하게 들어서는 봄의 입구 그의 몸이 한그루 유곽이네 몇 날 며칠 산적같은 사내를 들이는지 어느 새 바람 한 점씩 부풀어가네 몸 안의 등불을 켜들고 색(色)을 다 쓰고 나서야 한 무리의 봄이 시끌벅적 건너갈 것이네 가슴 데이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청춘을 피울 수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23
은신처 / 오명선 은신처 / 오명선 그가 걸어온 행적을 뒤져보면 고성방가, 노상방뇨, 음주운전, 기물파손, 공무집행방해 개도 안 물어 갈 저 습관성 여전히 진행형이다 몇 십 년 세 들어 살았던 교과서는 그가 가장 경멸한 낡은 방식의 소귀에 경 읽기 번식력 강한 그의 핑계는 심증만을 증폭시키고 사실을 은폐하려는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23
레드 시티 / 박지우 레드 시티 / 박지우 위태롭게 소리 위를 걷던 고양이 플러그 뽑힌 페이지를 들락거리며 욕설을 물고 왔다 나는 켜켜이 쌓인 빈 상자 속에 골목에서 튀어나온 욕설들을 숨겼다 내 손에는 고양이의 오물이 묻어 있다 -왜 상처가 났니 -늘 배가 고파요, 난 네루다의 물방울 속에 갇힌 은유만을 생각해요 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23
피아노를 켜다 / 강여빈 피아노를 켜다 / 강여빈 그늘을 드리우던 나무 한 채 가문과 뼈대로 백년을 누린다는 야마하가 간절한 손끝에 끌려왔다 정성을 기울여 뚜껑을 걷어내자 백옥처럼 하얀 몸이 우르르 튕겨 나왔다 그 여린 살을 찢고 가지 치며 쏟아져 나오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클레멘티 소나티네 다장조 하이든 소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23
안개의 성분 / 장인수 안개의 성분 / 장인수 안개는 지구를 돌아다니는 질척한 시간의 혈청이며 적막의 수원(水源)이어서 몸부림의 성분으로 흘러다닌다는 것! 안개의 혀에는 밀교적인 야생의 울음이 섞여있다는 것! 몽환의 본능을 풀어놓는다는 것! 차가운 혓바닥으로 허공을 마구 핥으며 씹는다는 것! 때로는 안개의이빨..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23
넌 어때? / 이정란 넌 어때? / 이정란 등바랜기우뚱한의자야 상상하지못하는복사기야 철지난문예지야 몇년째같은문구안고있는상패야 말못하는전화기야 손안닿는책꽂이에쌓인먼지야 매일 보이는 얼굴이 심-심-하니? 빨간 고무장갑아, 내 손가락 잘라 끼우고 싶니? 계란아, 내 머리를 계단으로 굴리고 싶니? 비누야, 내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23
여러분! / 이정란 여러분! / 이정란 # 죽음을 앞에 둔 성자가 마지막 말을 내려놓기 위해 바닥에 펴는 깔개 말 여러분! 계주할 때 앞서 뛴 사람에게 받은 봉과 같은 것 들판의 풀이 몸에서 꽃을 밀어낼 때도 새가 공중에서 꽃씨 섞인 똥을 눌 때도 소나무가 솔방울 떨어뜨릴 시기 가늠할 때도 바닷속 동물이 짝짓기 여행 떠..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23
누군가 내 바코드를 읽고 있다 / 변종태 누군가 내 바코드를 읽고 있다 / 변종태 비가 내리는 시외버스터미널 앞. 비가 내린다 영업용 택시들이 온몸을 적신 채 기다란 그리움을 흘리고 있다. 저 축축한 그리움들, 야생마처럼 말굽을 푸르릉거린다. 목 놓아 달리던 푸른 들판, 때로 붉은 신호등에 발목이 붙들려 안달하던 그리움, 속도 무제한..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23
삼월에 내리는 눈 삼월에 내리는 눈 김진기 차우차우* 만나기로 한 날 삼월의 미간에 눈이 내린다 경칩 개구리가 나왔다가 눈길에 허리가 비끗한다 마음 조이던 어제의 빗발이 밤이 되자 흰옷으로 갈아입는다 남녘, 어린 꽃잎이 혀로 바람의 간을 보며 북상을 서두르다가 쏟아지는 눈꽃에 입술이 파랗게 질린다 겨울이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