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 이원 고요 / 이원 시간을 깎는 칼이 있다 시간의 아삭거리는 속살에 닿는 칼이 있다 시간의 초침과 부딪칠 때마다 반짝이는 칼이 있다 시간의 녹슨 껍질을 결대로 깎는 칼이 있다 시간이 제 속에 놓여 있어 물기 어린 칼이 있다 가끔 중력을 따라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칼이 있다 그때마다 그물처럼 퍼덕..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4
무늬석에 묻다 / 김추인 무늬석에 묻다 / 김추인 돌 하나 건져내면 물내난다 물의 멀고 긴 유적, 억만 소리의 냄새 지질의 빛의 유전자가 보인다 백만 년 전 강물의 자모음 들린다 물속의 돌이 궁구하던 해와 해 사이 밤과 밤 사이를 내다보며 새의 문양을 천 년에 한뜸씩 중얼중얼 새겼으리라 전생의 전생으로부터 받아 온 별..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2
겨울들판 / 김다연 겨울들판 / 김다연 못 자국 깊은 옷을 펼쳐 입는다 잡아당기고 끌리면서 바람 배어든 자리마다 제 울음 괴며 낟알 쪼는 새처럼 못으로만 박음질한 겨울들판 못자리 꿴 채 한 벌로 한철을 난다 솔기 틀어진 고랑마다 그저 묵힐 수만 없다던 발씨 한 발 한 발 물꼬 트며 잡힌 지 오래된 물집을 홀친다 굳..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2
봄, 그 발긋거리는 것들 / 김추인 봄, 그 발긋거리는 것들 / 김추인 무희들이 돌아올 시각이다 이정표 하나 안전표지 한 조각 없이 무사귀환 할 수 있을까 하늘빛도 물빛도 파릇한 옹알이 눈치 챘지만 자고 깨면 새로 당도한 풋것들의 북적거림에 등달아 마음이 뜬다 취재라도 하듯 카메라를 치켜들고 봄의 경계를 쑤셔보지만 번번이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2
호두 두 알 / 문정영 호두 두 알 / 문정영 호두알은 뇌의 주름처럼 구릉이 많아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편두통이 없다 손아귀의 힘을 채우기 위하여 호두 두 알 소리가 나도록 비벼본다 서로 전신으로 몸 대하다보면 관계가 따뜻해지는 듯, 둘 사이에 윤기가 난다 속 안의 공기들 탄탄해져 내벽을 튕기는 탓이다 그가 자주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2
물 안에서의 봄 / 조원 물 안에서의 봄 / 조원 수족관에 벚꽃이 피었다. 담벼락을 타고 오르듯 유리벽 위 사방 연속무늬로 다리를 펼치는 문어 너의 지붕은 너무 투명해서 괄약근 풀어진 음부까지 보인다 물속 향기는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물의 꽃은 물속에서만 지는가 난무한 가지로 꽃 걱정 없던 네가 그 넓은 뜰은 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2
안개의 마을 / 김성수 안개의 마을 / 김성수 1 폐수 속에도 안개는 숨어있었다 2 한 때는 들숨 한 번에도 몸을 적시던 하천에는 버드나무 휘어진 잎새들이 물결을 간질이고, 까르르 밀려나던 물살들 등허리에 빛을 이고 흘러내렸다 그 속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것들은 맑았다 풀잎이 밤새 업고 있던 이슬을 굴려 떠나는 일행..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2
저 할머니의 슬하 / 문인수 저 할머니의 슬하 / 문인수 할머니 한 분이 초록 애호박 대여섯 개를 모아놓고 앉아 있다. 삶이 이제 겨우 요것밖엔 남지 않았다는 듯 최소한 작게, 꼬깃꼬깃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귀를 훨씬 지나 삐죽 올라온 지게 같은 두 무릎, 그 슬하에 동글동글 이쁜 것들, 이쁜 것들, 그렇게 쓰다듬어보는 일 말고..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2
배꼽 / 황상순 배꼽 / 황상순 과도로 사과의 배꼽을 파내다가 돌연 아랫배가 욱신거린다 맹장은 떼어낸 지 오래, 누가 칼을 곧추 세워 내 배꼽을 도려내는 것은 아닐까 그래, 나는 아주 오래 잊고 지냈다 꽃이 떨어진 자리 굳은 상처 배꼽은 더 이상 자라는 것이 아니어서 무럭무럭 커가는 열매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31
독무(獨舞) / 엄원태 독무(獨舞) / 엄원태 검붉은 벽돌담을 배경으로 흰 비닐봉지 하나, 자늑자늑, 바람을 껴안고 나부낀다 바람은 두어 평, 담 밑에 서성이며, 비닐봉지를 떠받친다 저 말없는 바람은, 나도 아는 바람이다 산벚 꽃잎들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던 때, 눈물 젖은 내 뺨을 서늘히 어루만지던, 그 바람이다 병..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