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 대한 예의 / 황인숙 꽃에 대한 예의 / 황인숙 유독 꽃을 버릴 때가 되면 곤혹스럽다 재활용은 안될 테고 일반쓰레기 봉투랑 음식물쓰레기 봉투 어느 쪽에 버리는 게 마땅한지 망설이다 종종 동네화단 덤불에 슬쩍 얹어놓곤 했다 때가 되어간다 이미 지났을지도 꽃병은 바닥까지 말랐을 것이다 물을 부어주는 게 왠지 계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31
포도씨를 먹는 여자 / 전건호 포도씨를 먹는 여자 / 전건호 아내는 포도를 씨앗 채 삼킨다 삼킨 씨앗들이 기름진 자궁에서 싹을 틔워 마음의 넝쿨로 뻗어나는지 오지랖 포도넝쿨 같다 머문 곳마다 포도송이 같은 입담을 매단다 단내를 맡고 벌떼가 모여 들 듯 동네 아줌마들이 꼬인다 동분서주, 약속이 넝쿨처럼 꼬여 어쩔 줄 모른..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31
감성조명 / 최승헌 감성조명 / 최승헌 당신 몸은 어둡거나 밝은 적이 없어서 내가 은밀하게 드나들기에 좋군요 여기는 당신 몸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서 아주 편안해요 선명하다는 건 자신을 다 까발려서 내보이는 것이니까 신비함이 없지요 만약 당신이 차갑거나 뜨겁거나 한 가지 느낌으로만 내게 들어온다면 갑자기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31
향나무의 소유권 / 마경덕 향나무의 소유권 / 마경덕 바람이 나무의 깃털을 스치면 가지에 걸린 새소리, 일제히 향나무의 목울대를 치고 올라 건너 옥탑방 처마 밑으로 팔려갔다 발가락냄새 2g, 그늘 한 스픈, 저녁바람 반 국자 저울에 달아 만든 노래는 골목에서 가장 잘 팔리는 인기품목 그늘을 제조하는 앞집 향나무는 참새들..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31
아드레날린의 할거 / 이민화 아드레날린의 할거 / 이민화 반쯤 열린 쪽창을 타넘는 바깥이 심상치 않다 해시시 풀려오는 풀향기에 취해 하마터면 추락할 뻔했다 대초원을 달리는 얼룩말의 속도만큼 아드레날린의 바깥은 깊고 푸르게 틔었다 숨이 가빠져서 양쪽 팔을 쭉 찢은 나는 발코니에 배꼽을 늘어뜨리고 은하철도999를 부른..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23
아름다운 위반 / 이대흠 아름다운 위반 / 이대흠 기사 양반! 저짝으로 조깐 돌아서 갑시다. 어찧게 그란다요 버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재 쓰잘데기 읎는 소리 하지 마시오 저번챀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노인네가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저번챀에도 내가 모셔다드렸는..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23
생산자이력제 / 김경곤 생산자이력제 / 김경곤 십년 만에 폭설이 내려 닭장을 주저앉혔다 쓰러진 잔해 속에서 꺼내는 닭은 평온했다 간간히 살아남은 닭을 출하하고서야 나도 주저앉는다 통닭을 주문하고 술을 마신다 티브이 속 실시간으로 지진사태 중계를 보며 접시에는 할복한 닭이 엎드려 있다 닭의 등으로 이별을 읽는..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23
그녀집 부엌 / 나기철 그녀집 부엌 / 나기철 냄비는 왜 저렇게 걸려있을까 프라이팬은 왜 저렇게 걸려있을까 국자는 왜 저렇게 걸려있을까 그릇은 왜 저렇게 엎어져 있을까 냄비는 왜 저렇게 타 버렸을까 시집<올레 끝> 2010년 서정시학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23
버진 팁 / 양애경 버진 팁 / 양애경 새 화장품 뚜껑을 열면 입구에 얇은 알루미늄 껍질이 달려 있지 그것을 잡아당겨 뽕! 떼면 그제서야 크림을 짤 수 있지 그걸 버진 팁(virgin tip)이라고 한다 새 제품의, 그러니까, 처녀막 처녀막을 잃으면 시집을 못 간다고, 테스는 딱 한 번의 일로 임신까지 해서 아이를 낳고, 잃고… 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23
봄동아, 봄똥아 / 황상순 봄동아, 봄똥아 / 황상순 봄동아, 볼이 미어터지도록 너를 먹는다 어쩌면 네 몸 이리 향기로우냐! 오랜만에 팔소매 걷고 밥상 당겨앉아 밥 한 공기 금세 뚝딱 해치운다만 네가 봄이 눈 똥이 아니었다면 봄길 지나는 그냥 흔한 풀이었다면 와작와작 내게 먹히는 변은 없었을 게 아니냐 미안하다만 어쩌..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