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의 죽음 - 박성민 어느 시인의 죽음 - 박성민 1 변두리 허름한 헌책방 먼지를 푹 뒤집어 쓴 시집 한권 툭툭 털며 읽는다 여성지와 중학교 문제집 사이에 꽂혀있는 시인 박정만 〈그대에게 가는 길〉 유고시집 기필코 한 주먹만 더 살아야겠다던 시인의 시집 靈肉을 짜내 쓴 시인의 피울음이 곰팡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16
학습지 공장의 민자 - 전유나 학습지 공장의 민자 - 전유나 고향친구 민자. 지난겨울 서툰 자전거를 타고 야쿠르트를 배달하다가 빙판길에 넘어져 발목뼈에 금이 가 기브스를 했다는, 삐끗한 삶에 질질 끌려 함박눈이 길을 지워버린 용문동 뚝방 어디쯤 허름한 학습지 공장에 다닌다는, 썩어가는 다리를 치료하지 못해 대들보에 목..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16
빈 들에 서다 - 이 정원 빈 들에 서다 - 이 정원 저, 무청 푸르딩딩한 대님만 남은 들판 우수에 잠겨 침침하다 단물로 품었던 속정까지 내주고야 빈 들이 되었다. 산발한 은발로 밭두둑 억새꽃 몇날 며칠 손짓 거듭했어도 내 안에도 썰렁 썰렁 비어가는 들판 있는거 눈치 못채고 있다가 11월이 들녘 끝자락부터 아득 아득 저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16
희망약국앞 무허가 종묘사 - 김해민 희망약국앞 무허가 종묘사 - 김해민 삼거리 `희망약국'앞 난전이 벌어진다. 보따리에선 배추씨 무씨 아욱씨 아주까리씨 삼씨, 잎담배에 당귀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쏟아진다. 장돌뱅이끼리 마수걸이 인사 잊지 않는다. 신식 종묘사에 밀려 이제는 손님구경이 수월치 않다. 말린 무화과 같은 입을 오물거..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16
구두끈을 풀며- 김희정 구두끈을 풀며- 김희정 퇴근하면 먼저 구두를 닦는다 긴장을 늦추지 않은 끈을 다시 풀어 본다 처진 하루를 깨우다 구두보다 빛바랜 내 모습이 있다 하루도 게으름을 피우지 못한 채 구두에 광을 낸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두에 잔주름 앉아 삶의 깊이를 묻지만 나는 구두약으로 덧칠할 뿐이다 굽은 닳..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16
브래지어를 풀고 / 김나영 브래지어를 풀고 / 김나영 브래지어 착용이 유방암 발생률을 70% 높인다는 TV를 시청하다가 브래지어 후크를 슬쩍 풀어 헤쳐본다 사랑할 때와 샤워할 때 외엔 풀지 않았던 내 피부 같은 브래지어를 빗장 풀린 가슴으로 오소소― 전해오는 시원함도 잠깐 문 열어놔도 날아가지 못하는 새장 속에 새처럼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16
곰곰/안현미 곰곰/ 안현미 주름진 동굴에서 백 일 동안 마늘만 먹었다지 여자가 되겠다고? 백 일 동안 아린 마늘만 먹을 때 여자를 꿈꾸며 행복하기는 했니? 그런데 넌 여자로 태어나 마늘 아닌 걸 먹어본 적이 있기는 있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16
사과꽃 램프 / 유미애 사과꽃 램프 / 유미애 식탁 위의 사과 한 알 등불처럼 흔들리는 저녁 어머니의 칼이 길을 트자, 종소리가 흩어졌다 헛간 뒤 사과밭 묘지, 봄에도 꽃 피지 않는 아버지의 나무 세잔의 열망도 파리스의 영예도 없이 침묵으로 돌아온 자식들 나무 아래 굽은 등 포개며 11월의 바람 소리를 듣는다 사막의 외..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16
빈 화분 / 김점용 빈 화분 / 김점용 베란다에 빈 화분이 하나 오래전부터 놓여 있다 언젠가 분재에 열중인 사람에게 어린나무를 너무 학대하는 거 아니냐고 넌지시 묻자 화분에 옮겨진 자체가 모든 식물의 비극 아니겠냐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빈 화분 그동안 실어 나른 목숨이 몇 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생각하면 나를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16
만두를 빚으며 / 조춘희 만두를 빚으며 / 조춘희 섣달그믐이 가까워 오면 동네 떡방앗집 아저씨 언성이 한 옥타브 높아진다 나란히 줄 세워 놓은 쌀 바구니가 아침밥 먹고 나오면 저만치 밀려있다 얌체 같은 사람들로 뒤로 밀리는 떡쌀 바구니 사는 일 할 말 다 못하고 사는 세상 그만 입 다물고 말았다 떡국에 넣을 만두를 빚..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