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밥상 / 우옥자 어머니의 밥상 / 우옥자 서너 걸음 늦게 수저를 드신 어머니, 식구들이 남긴 국을 마저 드시고 몇 오라기 나물과 마지막 김치조각까지 차례로 비운 후, 허기진 식사를 달게 마치셨다 '좋고 맛난 것만 먹을 수 있겄냐' 식구들 지청구에도 아랑곳없이 '이 땀 봐라, 모다 귀한 것이여'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2.29
담쟁이 / 정미경 담쟁이 / 정미경 거칠고 구부정한 소나무 밑동 타고 올라 구불구불 서툰 필체로 소나무를 받아 적는다 한 그루 기어이 완독하겠다고 솔향기 솔솔 베껴 그린다 소나무는 담쟁이의 노트 푸른 글씨 등걸에 빼곡하다 저 글씨 밑동부터 솥에 고아낸다 손마디 거칠고 등 굽은 아버지 평..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2.29
포장된 슬픔 / 구순희 포장된 슬픔 / 구순희 바다 변두리만 기웃거리는 게는 그 단단한 껍데기 속 창자가 없어 창자 끊어질 일 없다고 하지만 아니다 곧장 앞으로 가지 못하는 숙명은 이미 창자가 다 끊어져 더 이상 문드러질 게 없다 모래더미 속으로 어린 게가 어미게 속으로 필사적으로 파고들어간다..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1.04
형상기억합금 / 서상만 형상기억합금 / 서상만 비탈길에 지친 산개구리 한 마리 풀잎에 털썩 주저앉자 놀란 풀잎, 휘청휘청 땅바닥에 큰절하듯 엎드린다 보라! 저 작은 무게에도 출렁대는 삶 풀잎이 허리를 비틀자 산개구리 퍼뜩 알아채고 노을 너머 몸을 던진다 가녀린 풀잎 휘리릭 그제야 왔던 길 되돌..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1.04
놋쇠요령 / 서상만 놋쇠요령 / 서상만 ― 아내의 방 망미동 골동품 가게에서 놋쇠요령 하나를 샀다 젊은 날, 아내의 곱던 목소리같이 살짝 흔들어도 청아한 울림 파랗게 녹이 슬어 백년은 더 되었다고 가게주인이 세월에 덤을 달았다 이 요령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말문을 닫고 검불로 누운 그녀 침상..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1.04
슬리퍼 / 이문숙 슬리퍼 / 이문숙 지압 슬리퍼를 팔러 온 남자를 보고 생각났다 작년에 신다 책상 아래 팽개쳐 뒀던 슬리퍼 먼지를 폭삭 뒤집어쓰고 까마득 버려져서도 슬리퍼는 여전히 슬리퍼다 기억이란 다 그런 것이다 기억 속에는 맨홀 뚜껑 같은 확실한 장치가 없어서 그 아래 무언가를 고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1.04
국화꽃 장례식 / 최문자 국화꽃 장례식 / 최문자 단추 하나가 뚝 떨어진다 옷은 하나도 아프지 않다 남은 단추 세 개를 자세히 보니까 국화꽃 모양으로 생겼다 남은 국화꽃 세 송이도 아프지 않다 아프지 못한 것들은 수상하다 국화꽃 형상을 하려는 것들도 수상하다 반짝하고 설명이 안 되는 부표들 아프..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1.04
몸살 / 김인숙 몸살 / 김인숙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 길게, 멀리가고 싶은 몸 가두었다 주전자가 몸살을 앓는지 부글부글 열이 오른다 갇힌 것이 병이 된 모양이다 지독하게 긴 혼자만의 싸움이다 수양버들 가지처럼 늘어지는 오후 오월 산란기의 열목어 한 마리 계곡 아래 깊은 여울로 가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1.04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시월에 죽는다 / 이기철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시월에 죽는다 / 이기철 시월은 반짝이는 유리조각으로 내 발등을 찌른다 아픈 사람이 더 아프고 울던 벌레가 더 길게 운다 시월엔 처음 밟는 길이 오래 전에 온 길 같고 나에겐 익숙한 작별들이 한 번 더 이별의 손을 흔든다 노랑 양산을 펴들고 있는 저 은..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1.04
몸의 기억 / 이명수 몸의 기억 / 이명수 ― 木鐸論 스님이 오랜만에 절집에 돌아오셨다 법당에 들어가 목탁을 치셨다 목탁이 제 소리를 내지 않았다 목탁도 자주 쳐 주지 않으면 제 소리를 잃고 만다 제가 목탁인 것을 잊은 것이다 꽹과리, 징도 자주 쳐 주지 않으면 쇳소리를 잃고 만다 종도 사람도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