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조운 석류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조운(1900~?) 석류의 계절이다. 잘 익은 석류 소식이 저 남녘에서 새빨갛게 밀고 올라온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아니 쏟아져 내릴 듯 알알이 꽉 찬 석류에 눈이 다 부..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1.30
말문/김요일 말문 길이 막혔다 돌무더기 같은 소문과 시퍼런 유언비어에 짐승들의 귀는 커져만 갔다 그리고 비린 바람이 지나갔다 그뿐이다 문을 닫으면 그뿐 동강 난 혀들이 널부러져 있는 골목을, 비틀거리며 빠져나왔다 곰팡이 꽃 핀 혀 하나 겨우 챙겨 쫓기듯 도망을 쳤다 아름다운 노래만 부르..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1.30
소망(所望)/이봉환 소망(所望) 내 소망은 많지도 크지도 않아 자식이나 키우며 일없이 살고파. 산 한 곳을 장만하여 나무를 심고 창고에는 벼 백 섬을 거둬들이지. 공부 시켜 선대 가업 이어가고 닭을 삶고 돼지 잡아 이웃 부르네. 유유히 한 백년을 지내는 동안 태평시대 백성으로 보내고 싶네. 所望不豊侈(..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1.30
옹관(甕棺) 1/정끝별 옹관(甕棺) 1 모든 길은 항아리를 추억한다 해묵은 항아리를 세상 한 짐 풀면 해가 뜨고 별 흐르고 비가 내리는 동안 흙이 되고 길이 되고 얼마간 뜨거운 꽃잎 또 하루처럼 열리고 잠겨 문득 매듭처럼 덫이 될 때 한 몸 딱 들어맞게 숨겨줄 그 항아리가 내 어미였다면, 길은 다시 구부러져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1.30
우리 집/박남수 우리 집 큰길로 가다가 작은길로 접어들면 숨막히는 좁은 골목에 숨이 막히는 집이 있습니다. 높은 집이 가로막혀 납작 눌려 코가 눌린 코납작이 동네에 코납작이 집이 있습니다 그래도 못 찾으시겠으면 쫄망쫄망 조롱박 형제가 많아서 늘 엄마 목소리가 큰 집만 물으시면 거기가 우리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1.30
폐점/박주택 폐점 문을 닫은 지 오랜 상점 본다 자정 지나 인적 뜸할 때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형 한때는 옷을 걸치고 있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불현듯 鬼氣가 서려오고 등에 서늘함이 밀려오는 순간 이곳을 처음 열 때의 여자를 기억한다 창을 닦고 물을 뿌리고 있었다 옷을 걸개에 거느라 허리춤이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1.30
그리운 계산/이승은 그리운 계산 컴퓨터, 전자계산기 팍팍한 그런 거 말고 아홉 알, 열 알짜리 주판 하나 갖고 싶다 차르륵 털고 놓기를, 처음이듯 늘 그렇게. 어릴 적 울 아버지 반짝 종이 곱게 싸서 꺼내 놓던 안주머니 아릿한 그 허기까지 또 한 번 털고 놓을까, 헐렁한 이 해거름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1.30
입적(入寂)/곽재구 입적(入寂)/곽재구 늙은 재봉사가 1930년 영국산 재봉틀 앞에 앉아 낡은 옷을 깁는다 아슈바타 맑은 이파리가 춤을 춘다 그의 아버지가 재봉틀 앞에 머물 적에도 나무는 자신의 가슴 안에 들어 있는 신비한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려주었고 재봉틀은 시냇물처럼 노래했다 늙은 재봉사가 바..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1.30
비꼴 일이 있다/유풍 비꼴 일이 있다 소리개가 병아리를 나꿔채 동산의 높은 나무가지에 앉네. 가련하다 하늘 높이 날아야 할 새가 배고프니 안 하는 짓이 없구나. 불쌍하다 세상의 선비된 자들 앞으로는 무얼 할지 알기 어렵네. 처음부터 끝까지 잘해야 할 뿐 공연히 목소리만 높이지 말라! 有諷(유풍) 鳶攫..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1.25
가을 이미지/조영서 가을 이미지 /조영서 갑자기 종로에서 만난 가을. ―그 떫은 햇살 때문에 손수레 위에 빠알간 감. (하학길 달뜨게 한 紅枾) 소꿉 같은 널판 위에 앉은 가을 만나자 서너 발 앞서 횡단로 건너는 손짓. ―금빛 그 햇살 때문에 피 맑은 살 속 깊이 나이 든 하늘. ―조영서(1932~ ) 가을이라는 물건..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