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거산의 원통암 창가에서 題聖居山元通庵窓壁(제성거산원통암창벽) 성거산의 원통암 창가에서 題聖居山元通庵窓壁(제성거산원통암창벽) 동쪽에서 눈부시게 해가 떠오르고 신령한 비인가 나뭇잎이 떨어진다. 창문 열자 온갖 걱정 말끔해지고 병든 몸에선 날개가 돋으려 한다. 東日出杲杲(동일출고고) 木落神靈雨(목락신령우) 開窓萬慮淸(개창만려..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와유(臥遊)/안현미 와유(臥遊)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비닐우산/전병호 비닐우산 구멍가게에서 산 비닐우산 빗길로 나오면서 펴들면 먹구름 갈라지며 언뜻 내비친 파란 하늘 맑은 하늘 밑에 잠시 서서 즐겁게 듣는 소나기 소리 아, 구멍가게에서 산 파란 하늘 머리 위에 동실동실 띄우고 빗길을 갑니다 빗소리도 데리고 갑니다 ―전병호(1953~ ) 우리는 길을 가..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풀 잡기/박성우 풀 잡기 올해만큼은 풀을 잡아보겠다고 풀을 몬다 고추밭 파밭 가장자리로, 도라지밭 녹차밭 가장자리로 풀을 몬다 호미자루든 괭이자루든 낫자루든 잡히는 대로 들고 몬다 살살 살살살살 몰고 싹싹 싹싹싹싹 몬다 팔 다리 어깨 허리 무릎, 온몸이 쑤시게 틈날 때마다 몬다 봄부터 이짝..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사금(砂金)/홍성란 사금(砂金) 입을 막고 울었다 소리 나지 말라 울었다 저녁 햇빛 쓸쓸해 커튼을 내리고 사람은 때로 혼자서 울 줄 아는 짐승 책갈피 씀바귀꽃 곱게도 말랐는데 소리 나지 말라 해도 소리 나는 울음 있어 모래 손 흩어버리면 사금처럼 남는 별 들키고 싶은데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바보들아,..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나비처럼 가벼운 이별/박연준 나비처럼 가벼운 이별 어제 오후에 해바라기를 씹어먹었다 내가 해바라기를 먹자, 해바라기들이 붉어요 붉어요 하며 흐느꼈다 그는 꽃밭에다 나를 앉혀놓고 고무찰흙을 토닥여 내 남편을 만들더니 빨간 꽃잎 따 나비넥타이까지 장식해선 브로치처럼 앞가슴에 달아준다 그리고 뒤돌아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어린 아들/정약용 어린 아들 얼굴도 잘 생긴 어린 내 아들 흐리거나 맑거나 걱정이 없네. 풀밭이 따스하면 송아지처럼 내빼고 과일이 익으면 원숭이인 양 매달리네. 언덕배기 지붕에서 쑥대 화살 날리고 시냇가 웅덩이에 풀잎배를 띄우네. 어지럽게 세상에 매인 자들아 어떻게 너희들과 함께 놀겠나! 稚子(..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1.30
물음/천양희 물음 세 번이나 이혼한 마거릿 미드에게 기자들이 왜 또 이혼했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녀가 되물었다 “당신들은 그것만 기억하나 내가 세 번이나 뜨겁게 사랑했다는 것은 묻지 않고” 시 쓰는 어려움을 말한 루이스에게 독자들이 왜 하필 시를 쓰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가 되물었다 “왜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1.30
집오리/권오훈 집오리 우리 속에 날 왜 가둬 왜 왜 왜 왜 문 열어주면 넓은 세상 빨리 가자 갈 갈 갈 갈 연못에 뛰어들어선 어, 시원하다 어 어 어 어 ―권오훈(1937~ )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집오리가 시끄럽게 꽥꽥거린다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우리 속에 왜 가두느냐고 항변하는 줄은 몰랐다. 그리고 문..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1.30
첫 줄/심보선 첫 줄 첫 줄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써진다면 첫눈처럼 기쁠 것이다. 미래의 열광을 상상 임신한 둥근 침묵으로부터 첫 줄은 태어나리라. 연서의 첫 줄과 선언문의 첫 줄. 그것이 써진다면 첫아이처럼 기쁠 것이다. 그것이 써진다면 죽음의 반만 고심하리라. 나머지 반으로는 어떤 얼음..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