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舞姬의 춤/피천득 어떤 舞姬의 춤 고개 숙여 악사들 줄을 울리고 자작나무 바람에 휘듯이 그녀 선율에 몸을 맡긴다 물결 흐르듯이 춤은 몹시 제약된 동작 “어찌 가려낼 수 있으랴 舞姬와 춤을” 白鳥 나래를 펴는 優雅 옥같이 갈아 다듬었느니 맨발로 가시 위를 뛰는 듯 춤은 아파라 ―피천득(1910~2007) 영..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오리털 파카/이상범 오리털 파카 덤불과 갈대가 어우러진 늪의 하오 동짓달 끝무렵의 찬바람이 나부낀다 늪 가의 더듬이 오솔길 서걱이는 풀잎소리……. 둑에 오르면 옷섶 가득 도깨비바늘 갈대소리 서걱서걱 늪이 다시 펼쳐지고 쇠오리 떼로 와 앉아 우포늪은 빛났다. 창녕을 뒤로 한 지 달포도 넘었는데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기러기의 詩 ―洛東江·12/이달희 기러기의 詩 ―洛東江·12 강 마을 긴 긴 겨울밤에 얼어붙은 강물 위로 날아가던 저 기러기들의 울음소리는 희디흰 달빛의 시였다. 싸늘한 삭풍 속에 북쪽 하늘로 끼륵 끼르륵, 끼륵 끼르르륵 끼륵…… 시옷 자를 그리며 서럽게 날아가던 스무 마리 눈물의 시. 조금 뒤처져 힘없이 끼웃끼..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정말 괴롭다/유진한 정말 괴롭다 그럭저럭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서 이 달이 지나가면 새해가 다가온다. 창천이 굽어보며 반가운 듯 햇살 비춰도 대지에 버텨 서서 난 맨주먹 휘두른다. 시골에서 술에 취해 으스대던 이백(李白) 같지만 고향에 밭뙈기 없어 한탄하는 소진(蘇秦)의 신세! 언제나 양주(楊州) 자..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나의 노래/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나의 노래/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나의 이 노래는 다정한 사랑의 팔처럼 내 아기여, 너의 주위를 음악으로 휘감을 것을. 나의 이 노래는 축복의 입맞춤처럼 너의 이마를 어루만질 것을. 네가 혼자 있을 때 그것은 네 옆에 앉아 네 귀에 속삭여주고 네가 뭇사람들 속에 끼여 있을 때 그것은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구공탄/박홍근 구공탄 조심조심 양손에 구공탄 들고 허리도 못 펴고 살금살금 걷는다 뒤따라오던 동생이 또 한 번 건드리자 화는 나도 구공탄은 사알짝 내려놓고 도망가는 동생을 오빠는 쫓아간다 바람 찬 저녁 길에 구공탄 두 개 ―박홍근(1919~2006) 겨울이 시작되면 오래된 사진첩처럼 '구공탄'이라는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이제는 자유?/황인숙 이제는 자유? 수화기에서 솔솔 찬바람이 나오네. 점점 차거워지네. 서리가 끼네. 꼬들꼬들 얼어가네. 줄이 비비 꼬이네 툭, 툭, 끊어지네. 아, 이제 전화기에서 뚝 떨어져 자유로운 수화기. 금선이 삐죽 달린 그걸 두고 그녀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네. 전화기에서 천 리 만 리 떨어진 곳도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그릇에 관한 명상/이지엽 그릇에 관한 명상 흙과 물이 만나 한 몸으로 빚어낸 몸 해와 달이 지나가고 별 구름에 새긴 세월 잘 닦인 낡은 그릇 하나 식탁 위에 놓여 있다 가슴에 불이 일던 시절인들 없었으랴 함부로 부딪혀 깨지지도 못한 채 숨 막혀 사려 안은 눈물, 붉은 기억 없었으랴 내가 너를 사랑함도 그릇 하..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어느 거장의 죽음/노향림 어느 거장의 죽음/노향림 낡은 마하 피아노가 전 재산이다 키가 유난히 작고 등이 굽은 피아니스트 그는 오래전부터 수전증을 앓고 있다. 연주 때마다 활짝 열리는 피아노 뚜껑 그 밑 낭떠러지 같은 외길이 드러나고 가는 막대 하나가 파르르 떨린다. 어디선가 가는 발목의 새들이 무더기..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밤/이산해 밤 검푸른 솔숲으로 밤안개 자욱하더니 눈썹 같은 초승달이 서쪽으로 잠겼다. 개 짖는 소리 잦아들며 인적이 끊긴 마을 관솔불이 타 들어가 토방 안은 깊어간다. 창 아래서 흥얼흥얼 글 읽는 소리 들려오고 이불이 펼쳐진 화롯가에는 군밤이 익어간다. 아득히 먼 한양의 남산 아래 집에서..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