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해주러 간다/유안진 밥해주러 간다 적신호로 바뀐 건널목을 허둥지둥 건너는 할머니 섰던 차량들 빵빵대며 지나가고 놀라 넘어진 할머니에게 성급한 하나가 목청껏 야단친다 나도 시방 중요한 일 땜에 급한 거여 주저앉은 채 당당한 할머니에게 할머니가 뭔 중요한 일 있느냐는 더 큰 목청에 취직 못한 막내..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김옥춘 선생님/임길택 김옥춘 선생님 달려가서 선생님을 부르면 뒤돌아 서 있다가 우리를 꼬옥 안아 줍니다 땟국물 흐르는 손 따뜻이 쥐여 주시고 눈 맑다 웃으시며 등 두드려 줍니다 그럴 때면 선생님 고운 옷에 푹 나를 묻고서 선생님 냄새를 맡아 봅니다 선생님을 선생님을 우리 엄마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길이 나를 들어올린다/손택수 길이 나를 들어올린다 구두 뒤축이 들렸다 닳을 대로 닳아서 뒤축과 땅 사이에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공간이 생겼다 깨어질 대로 깨어진 구두코를 닦으며 걸어오는 동안, 길이 이 지긋지긋한 길이 나를 들어 올리고 있었나 보다 닳는 만큼, 발등이 부어오르는 만큼 뒤꿈치를 뽈끈 들어..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나의 아나키스트여/박시교 나의 아나키스트여 누가 또 먼 길 떠날 채비하는가 보다 들녘에 옷깃 여밀 바람 솔기 풀어놓고 연습이 필요했던 삶도 다 놓아 버리고 내 수의(壽衣)엔 기필코 주머니를 달 것이다 빈손이 허전하면 거기 깊이 찔러 넣고 조금은 거드름 피우며 느릿느릿 가리라 일회용 아닌 여정이 가당키나..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고장난 자전거/권혁웅 고장난 자전거 고장난 자전거, 낡아서 끊어진 체인 손잡이는 빗물에 녹슬어 있었네 고장난 자전거, 한때는 모든 길을 둥글게 말아쥐고 달렸지 잠시 당신에게 인사하는 동안에도 자전거는 당신의 왼쪽 볼을 오른쪽 볼로 바꾸어 보여주었네 자전거는 6월을 돌아나와 9월에 멈추어 섰지 바..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천연의 살림살이/정학연 천연의 살림살이 담쟁이넝쿨로 옷 해 입고 난초로 띠를 매면 어울릴까? 개울가의 나무 밑에 가지 엮어 살고 싶다. 섬돌 덮은 파초 잎은 부치기 쉬운 부채이고 길을 덮은 이끼는 넓게 깐 보료겠네. 낚싯대 잡고 비를 뚫고 가면 그게 바로 지팡이요 바위에 걸터앉아 계곡물 내려보면 방석이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입동/이창수 입동(立冬) 소나기 지나가고 물웅덩이가 남아 있네 물웅덩이 속으로 구름이 지나가네 구름 속으로 고추잠자리가 사라지네 말라붙은 흙 속으로 하늘이 사라지네 흙 속으로 사라진 하늘에서 개망초가 올라오네 개망초 위로 소나기와 구름과 고추잠자리가 지나가네 모두가 지나간 자리에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엄마의 배웅/유희윤 엄마의 배웅 고장 난 냉장고 안과 밖을 깨끗이 닦은 엄마 마른행주질 하시곤 문짝에 뽀뽀했다 다둑다둑 등판 두드려 주며 혼자 말했다 ―어느 새 15년이나 되었구나 그 동안 애썼다 정말 수고 많았다 새 냉장고 타고 온 트럭에 고장 난 냉장고 태워 보낸 엄마 한참 동안 대문 밖에 서 계셨..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국수/유종인 국수 1 늙은 창녀와 먹어도 되고 노숙 노인과 먹어도 되네 도망 중인 조선족과 눈빛 깊은 네팔인(人)과 한 세월 젓가락질하며 울음 감춰 먹어도 되네 2 출출하신 어머니가 무덤 밖에 나셨을 때 무덤 문 닫히기 전에 아들과 서서 먹는 저승도 장수하시라 말아드린 잔치국수 ―유종인(1968~ )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
숲/정희성 숲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정희성(1945~ ) 나뭇잎이 우수수 져 내린 산길로.. 가슴으로 읽는 詩 2012.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