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에서 / 한성례 운동장에서 / 한성례 푸듯푸듯 흙먼지가 날아왔다. 살끝에서부터 간지럼타는 유년의 기억들 미루나무 꼭대기에 고추잠자리가 맴돌면 어지럼증처럼 들판 끝을 바라보았던 들녘으로 난 나의 운동장, 끝은 아득했다. 벼가 누럿누럿거리면 한 귀퉁이 두레박 우물물이 가득 고이고 운동회는 시작 되었다.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31
원정(園丁)/ 장만호 원정(園丁)/ 장만호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다* 하늘은 어디에 이 많은 음들을 숨겨두고 있었던 걸까 부딪히자마자 세상을 온통 악기로 만드는 환한 빗방울들, 이런 날이면 새들도 타악기다 흙들은 더욱 겸손해져서 길 잃어 젖은 개미에게도 발자국을 허락한다 덜 자란 풀꽃들을 솎아내는 일은 언제나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31
오동나무 열쇠 / 김남수 오동나무 열쇠 / 김남수 오동나무 가지에 열쇠가 걸려있다 누군가 길에서 주운 열쇠를 나무에게 맡겨놓고 갔다 얼마나 열고 닫았는지 구부러진 열쇠를 가지가 휘도록 들고 서있다 건너편 천주봉 세탁소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 주봉씨는 오동나무 가지를 끌어당겨 뽕짝 풍으로 구겨진 나뭇잎만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31
肉親 / 손택수 肉親 / 손택수 책장에 침을 묻히는 건 어머니의 오래된 버릇 막 닳인 간장 맛이라도 보듯 눌러 찍은 손가락을 혀에 갖다대고 한참을 머물렀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곤 하지 세상엔 체액을 활자 위에 묻히지 않곤 넘어갈 수 없는 페이지가 있다네 혀의 동의 없이는 도무지 읽었다고 할 수 없는 페이지가..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31
연탄 갈아 넣기 / 정대구 연탄 갈아 넣기 / 정대구 - 어머니 생각 허리 구부려 연탄아궁이에 연탄 갈아 넣기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웬일로 연탄은 꼭 새벽에만 갈아 넣게 되었던지 웬일로 그때는 또 그렇게 추웠던지 영하 10도가 넘는 새벽 두 세시 사이에 어머니는 일어나 연탄을 갈러 나가셨다 나는 알면서도 잠자는 척 이불을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31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외 5편 / 권혁웅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외 5편 / 권혁웅 그해 여름 정말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멱을 따기 위해 우리에서 끌어낸 중돈이었다 어설프게 쳐낸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돼지는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자진하는 슬픔을 아는 돼지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칼을 든 채 달려들었으나 꼬리가 몸을 들어올릴 수는 없..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31
원추리여관 / 안도현 원추리여관 / 안도현 왜 이렇게 높은 곳까지 꽃대를 밀어 올렸나 원추리는 막바지에 이르러 후회했다 꽃대 위로 붉은 새가 날아와 꽁지를 폈다 접었다 하고 있었다, 원추리는 어쩔 수 없이 방을 내어주고 다음 달부터 여관비를 인상한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했다 멀리서 온 것이나 키가 큰 것은 다..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31
독수리 오형제 / 권혁웅 독수리 오형제 / 권혁웅 0. 기지 (基地) 정복이네는 우리 집보다 해발 30미터가 더 높은 곳에 살았다 조그만 둥지에서 4남 1녀가 엄마와 눈 없는 곰들과 살았다 곰들에게 눈알을 붙여주면서 바글바글 살았다 가끔 수금하러 아버지가 다녀갔다 1. 독수리 큰형이 눈뜬 곰들을 다 잡아 먹었다 혼자 대학을 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31
귀 / 이규리 귀 / 이규리 동네 미장원에서 한 방 뚫었던 구멍 한 때는 쇠붙이나 구슬이 노래를 흘려보내던 곳이다 구멍이 있어 소리는 더 맑게 울리기도 했지만 늘어난 구멍은 몸의 외부인 듯하다 아궁이 깊은 고래 속으로 불길 들어갈 때 환한 구멍 아득히 붉고 뜨거워 아랫도리가 자꾸 조여졌으나 귀고리를 달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31
연필의 간 / 김경주 연필의 간 / 김경주 연필 속에서 간이 흘러나온다 간 속의 노란 돌가루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란 돌가루 연필 속에서 탄광이 쏟아져나온다 탄광을 파내어 간을 찾는 자, 시를 쓴다 해골이 어조를 남기고 거울 속에서 웃는다 연필은 잡념의 생식기 푸른 먼지 하나 허리를 흔들며 사라져가고 헐리고 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