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오후 / 이생진 바다의 오후 / 이생진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1.14
술과 시인 / 이생진 술과 시인 / 이생진 마을 이장이 술 한잔 하자 한다 그는 손수 안줏감을 비닐에 싸들고 왔다 “소주 한잔 하자 구요” 하며 비닐봉지를 열어놓는다 “술을 못하는데요” 이장 왈 “시 쓴다고 하기에 술은 하는 줄 알았죠” 이장은 실망했을 거다 “술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시냐?”고 그의 외로움을 달..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1.14
거문도 등대로 가는 길 3 / 이생진 거문도 등대로 가는 길 3 이생진 빽빽이 들어선 터널은 바다 속처럼 깊고 오른발 밑 절벽은 굴 구멍보다 어둡다 일몰에 조심해야지 나도 모르게 끌려가는 내 목숨 자연이 무서운 줄 절벽에서 알았다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1.14
거문도 등대로 가는 길 2 / 이생진 거문도 등대로 가는 길 2 / 이생진 다시 터널 동백나무 터널 여기서 새가 울기 시작할 경우 너는 행복하다고 소리치렴 네 행복 누가 빼앗지 않을 테니 “ 나는 행복하다 ”라고 세 번만 소리치렴 아무도 보지 않으니 부가세도 붙지 않을 테고 “ 나는 행복하다 ” 라고 외치렴 너도 한번쯤은 행복에 자..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1.14
거문도 등대로 가는 길 1 / 이생진 거문도 등대로 가는 길 1 숲속을 나와 다시 숲속으로 나는 천국에서 걷는 걸음을 모르지만 이런 길은 이렇게 걸을 거다 가다가 하늘을 보고 가다가 바다를 보고 가다가 꽃을 보고 가다가 새를 보고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머리로 고민하지 않아도 웬일로 나를 나무가 꽃이 새가 혹은 벌레가 아직 살아..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1.14
녹산 등대로 가는 길 3 / 이생진 녹산 등대로 가는 길 3 / 이생진 외로운 사람이 외로운 사람을 찾는다 등대를 찾는 사람은 등대같이 외로운 사람이다 무인등대가 햇빛을 자급자족하듯 외로움을 자급자족한다 햇볕을 받아 햇볕으로 바위를 구워 먹고 밤새 햇볕을 토해내는 고독한 토악질 소풍 온 아이들이 제 이름을 써놓고 돌아간 후..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1.14
대나무 소리 / 이생진 대나무 소리 / 이생진 오후 네 시 반 나는 동도 대밭 길 언덕에 서 있고 배는 여수를 향해 가는구나 사실이지 배는 가고 싶은데도 없는데 억지로 가는구나 여기서는 여수 밖에 갈 곳이 없다 거문도에 오면 죽어라 하고 가는 곳이 여수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염소처럼 풀을 뜯어야 외롭지 않다 홀로 남아..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1.14
시를 쓰는 염소 / 이생진 시를 쓰는 염소 / 이생진 동도의 검은 염소에게 검은 글씨를 가르쳤다면 그 놈도 똥 대신 바윗돌에 질퍽한 시 몇 줄을 썼을 텐데 어찌하여 사람만 글을 배워 사람만 아는 척하는가 저 놈도 시를 알면 나와 마주 앉아 술 한잔 나눌 수 있는 성분인데 어찌하여 저 놈은 풀만 뜯게 하고 나만 술 마시며 시를..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1.14
나는 음침해 / 이생진 나는 음침해 / 이생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나는 좀 음침해 내 속은 나 밖에 몰라 하지만 음지와 양지를 비교할 때 시도 버섯처럼 음지에서 자라거든 그래서 나는 시에 적성이 맞아 고로 나는 시를 쓰기 위해 음침해야 해 혼자 집을 떠나 혼자 산에 오르고 혼자 굴속을 기웃거리고 혼자 바닷가를 거닐..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1.14
풀밭에 누워서 이런 생각 / 이생진 풀밭에 누워서 이런 생각 / 이생진 풀밭에 푹 파묻힌 선인 같아서 내가 하늘에 있음을 자인하며 자위하며 혹은 자축하며 혼자란 이 맛에 외롭다고 못 한다 풀숲에 사는 벌레는 그래서 우는 것인데 호수 같은 설움을 겨우 그것으로 달래는 미약함 쑥부쟁이 꽃이 날 알아본다 제주 섬에서도 만났지 그가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