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 / 안도현 모퉁이 / 안도현 모통이가 없다면 그리운 게 뭐가 있겠어 비행기 활주로, 고속도로, 그리고 모든 막대기들과 모퉁이 없는 남자들만 있다면 뭐가 그립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계집애들의 고무줄 끊고 숨을 일도 없었겠지 빨간 사과처럼 팔딱이는 심장을 쓸어내릴 일도 없었을 테고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12.26
여자/양애경 여자/양애경 양잿물로 삶아 햇볕에 잘 말린 란닝구처럼 하얗고 보송한 여자 가슴팍에 코를 묻으면 햇빛 냄새가 나는 여자 머리칼에 빰을 대면 바람 냄새가 나는 여자 잘 웃는 여자 낡은 메리야스처럼 주변 습기를 금방 흡수해 쥐어짜기만 하면 물이 흐르는 여자 잘 우는 여자 편서풍에 날..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12.26
담장을 허물다/공광규 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살던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12.24
절하다 / 김기택 절하다 / 김기택 수십 마리의 통닭들이 좌판 위에 납작 엎드려 절하고 있다 털을 남김없이 벗어버린 나체로 절하고 있다 발 없는 다리로 무릎 꿇고 머리 없는 목을 공손하게 숙여 절하고 있다 목과 발을 자르고 털을 뽑은 주인에게 죽음의 값을 흥정하는 손님에게 이미 죽은 죽음을 끓여..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11.30
그 아무것도 없는 11월/문태준 그 아무것도 없는 11월/문태준 눕고 선 잎잎이 차가운 기운뿐 저녁 지나 나는 밤의 잎에 앉아 있었고 나의 11월은 그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무덤에 불과하고 오로지 풀벌레 소리여 여러번 말해다오 실 잣는 이의 마음을 지금은 이슬의 시간이 서리의 시간으로 옮아가는 때 지금은 아직 이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11.25
강아지 똥 / 정원도 강아지 똥 / 정원도 약수터 길모퉁이 풀섶에 강아지 똥 몇 덩이 가만히 모셔져 있다 강아지를 사랑할 줄 모르는 여인들이 약수터로 강아지 데리고 산책 나왔다가 멀쩡한 강아지 허물만 회수해 가고 이쁜 그 속은 내버리고 간 것을 시퍼런 풀들이 온몸으로 이슬 적시며 고이 모시는 중인데..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11.25
황혼 이혼 / 정해영 황혼 이혼 / 정해영 흙먼지를 흠뻑 뒤집어쓰고 실핏줄 같은 오지의 산길까지 따라 다니던 여행 가방이 미끈하게 뻗은 도시의 길 한 복판에서 툭 벌어졌다 저장 식품처럼 갇힌 울분이 팽창하여 터져 버린 것이다 악취가 나는 못 볼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십 년을 동행했던 허름한 가방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11.25
금목서 향기 / 박명남 금목서 향기 / 박명남 마당 이쪽, 금목서 연주황 꽃 핀다. 샤넬 NO 5 향수보다도 그윽하게 출렁거린다. `당신의 마음을 끌다'라는 꽃말 따라 깊어가는 이 가을밤 훔치고 싶다. 저 작은 꽃송이에서 이토록 어지러운 향기가 나는 것은 정말 모를 일이다. 황홀한 향기 하나로 이 세상을 다 덮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11.25
연리지(蓮理枝) / 정끝별 연리지(蓮理枝) / 정끝별 너를 따라 묻히고 싶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열 길 땅속에 들 한 길 사람 속에 들어 너를 따라 들어 외롭던 꼬리뼈와 어깨뼈에서 흰 꽃가루가 피어날 즈음이면 말갛게 일어나 너를 위해 한 아궁이를 지펴 밥 냄새를 피우고 그물은 달빛 한 동이에 삼베옷을 빨고 한..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10.28
연리지連理枝 / 김해자 연리지連理枝 / 김해자 開心寺 오르는 길 마음의 허물 뒤집어쓴 채 洗心洞 막 지나는데 백주대낮에 소나무 두 그루 얽혀 있다 한 놈이 한 놈의 허벅지에 다리를 척 걸친 채 한몸이 되어 있다 가만히 보니 결가부좌를 튼 부처 같기도 한데 육감적인 아랫도리 위에서 어쨌거나 잔가지들은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