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의 가을/이상국 옥상의 가을/이상국 옥상에 올라가 메밀 베갯속을 널었다 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 햇빛 속으로 달아난다 우리나라 붉은 메밀대궁에는 흙의 피가 묻어있다 지구도 흙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 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 어쨌든 세상의 모든 옥상은 아이들처럼 거미처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08.11
가을, 전갈자리 - 생일에 / 이경임 가을, 전갈자리 -생일에 이경임 하필이면 눈 시린 가을날의 점지였나 어머니 자궁 속을 가랑잎처럼 비우고 깊은 물 맨발로 걸어 배냇짓도 겨운 날. 한 그릇 정화수에 먼 하늘빛 담아 놓고 오래 전 눈 여겨 둔 살뜰한 전갈자리 광년을 가로질러 온 서릿길이 보인다. 이제야 알 것 같네, 어머..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08.10
집시가 된 신밧드/서영식 집시가 된 신밧드서영식 대리석 바닥 틈으로 발을 밀어 넣은 이끼 널브러진 빵조각을 뜯어먹는 푸른 곰팡이 빌붙어 사는 것들도 푸르를 수 있는 그 곳 서울역 지하도 바닥에 사내가 잠들어 있다 종일토록 모래를 이고 날랐을 머리칼 사이 탈출한 사막의 알갱이들도 빌붙어 잠잔다 맹독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08.10
혁필화(革筆畵)를 보며 / 이민아 혁필화(革筆畵)를 보며 이민아 맞춤주문한 전각(篆刻)을 품고 도장집을 나서는 길, 인사동 돌확 옆 낡은 좌판 위로 어스름한 새벽을 펼쳐놓은 노인을 향해, 다채로운 구두코가 나이테처럼 둘러서서 푸른 중절모를 쓴 혁화쟁이의 거친 손이 그려내는 혁필화를 본다 어느새 기념족자 신청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08.10
라훌라 /최해경 라훌라 /최해경 -길모퉁이에서 누군가를 부르며 부르트며 바람이 거리를 휘감는다 어둔 밤 얼룩처럼 드문드문 가로등이 번지고 막차를 기다리는 내 등뒤에서 멀어져라 뒤돌아보지 마라 바람은 쉰 목소리로 다그치듯 나를 자꾸 떠민다 그는 저 만치서 나를 향해 말없이 서 있을 것이다 자..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08.10
중 심 /심수향 중 심 /심수향 11월에도 꽃이 필 수 있다는 듯이 배추가 제 삶의 한창때를 건너고 있다 꽃을 피우고 싶어하는 푸른 이마에 금줄같은 머리띠 하나 묶어주려고 이참 저참 때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배추는 중심이 설 무렵 묶어주어야 한다고 귀뜸을 한다 배추도 중심이 서야 배추가 되나보다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08.10
문상(問喪) /정 선 주 문상(問喪) /정 선 주 은행나무 그 아래 낡은 구두 한 켤레 행길을 뒤로 한 채 돌아선 늙은 마음 마을을 지나 온 저녁비가 소슬히 덮고 있다. 살아서 걸어 온 길 죄다 끊어 버리고 뿌리 위에 기대고 누운 편안한 저 침묵 성소(聖所)에 발길 옮기듯 생각이 깊어 있다. 하늘로만 솟구치던 노오..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08.10
바람과 뱃사공 /김면수 바람과 뱃사공 /김면수 갈잎의 노래로 자란 바람이 구름에게로 가 입김을 불면 입김의 무게 만큼 쏟아지는 햇살을 한 올 한 올 모으고 저녁 강가에 산란을 하며 물이 든 노을은 수심 깊은 바다로 가 유년의 추억이 된다 밤이면 낡은 목선에도 훤히 불 드는 전구 그물마다 달과 별과 스무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08.10
멜순 /강윤미 멜순 /강윤미 길섶 가시덤불 속에서 용케도 멜순을 찾아내시는 어머니 재잘거리는 내 눈이 서운할까 마주치시는 것도 잊지 않고 말에 간간이 추임새를 넣어주면서도 그녀의 등허리는 보이지 않는 그것을 향해 있다 두 눈 부릅뜨고 그녀의 눈길을 따라가 보지만, 내 눈에는 엉킨 실타래같..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08.10
문을 열고 / 이민화 문을 열고 / 이민화 어수선한 사건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골 깊은 등줄기에 멍으로 남은 자국 세월의 회초리 앞에 허물을 벗는 시간 혼돈을 움켜쥐고 방황하는 시대가 늦가을 설거지로 타오르는 불 마당에 두꺼운 가면을 벗어 미련 없이 태운다. 들국의 마른 꽃대가 겨울 앞에 꺾이고 새로..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2.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