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사용 설명서 / 홍일표 달빛 사용 설명서 / 홍일표 희귀종이 되어 멸종 위기에 처한 달빛은 머잖아 박물관 한 구석에 처박히거나 고서의 한 모퉁이에서 잔명을 이어갈 것이다 함부로 달빛 한 점 건드리지 마라 주의사항을 숙지하지 않으면 삽시간에 휘발할 것이다 여간해선 달빛 한 올 발굴할 수 없지만 용케 찾아낸 달빛은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백련, 불을 켜다 / 홍일표 백련, 불을 켜다 / 홍일표 연밭을 휘저으며 돌아다니던 오리가 남루한 흙탕물을 벗어던진다 오리의 몸을 잡고 있던 물들이 줄줄이 매달린다 흰 상여 뒤를 따르는 유족들 같다 물은 금세 제 자리로 돌아가 몸을 잠가버리고, 물을 떼어낸 오리는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듯 깃털 사이사이에 숨은 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모과나무 / 서수찬 모과나무 / 서수찬 우리 회사 앞에 모과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 나무에는 열매가 익기 전에 따먹지 말라는 푯말이 걸려있다 모과 열매를 따먹는 사람이 있긴 있나 보다 못 생기고 누가 몇 백번을 주물렀다 폈다 하면서 구겨놓은 열매 어디서나 다 보이게 얼굴은 왜 그렇게 큰지 신문지를 덮어두고 싶은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축제 / 권정일 축제 / 권정일 그랬다, 순식간 허공을 점령하는 가창오리 떼를 보며 예민한 저들의 신호체계를 나는 울음으로 들었다 한 놈의 수상한 날갯짓이 수십 만 마리 한점 노을이었다가 회귀하는 바람의 획, 나는 공포였다 솟구쳤다, 내리꽂히는 저들의 생태계, 깃털하나 다치는 일 없이 일사분란하다 누가 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능소화 / 박제영 능소화 / 박제영 요선동 속초식당 가는 골목길 고택 담장 위로 핀 꽃들, 능소화란다 절세의 미인 소화가 돌아오지 않는 왕을 기다리다가 그예 꽃이 되었단다 천년을 기다리는 것이니 그 속에 독을 품었으니 함부로 건드리지 말란다 혹여 몰라볼까 꽃핀 그대로 떨어지는 것이니 참으로 독한 꽃이란다 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자벌레, 자벌레가 / 변종태 자벌레, 자벌레가 / 변종태 오일시장에서 열 개에 오백 원 주고 사 왔다는, 칠순 노모가 심어놓은 고추 모종을 자벌레 한 마리가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제 몸을 접고 접어 세상을 재던 놈이 제 몸의 몇 십 배는 됨직한 고추 모종을 해치우고 나서 다른 모종으로 건너가다가 내 눈에 딱 걸렸다. 이걸 어떻..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개와 단풍나무의 허기 / 백상웅 개와 단풍나무의 허기 / 백상웅 배곯아도 뒹굴 수 없는 너는, 쓰름매미 때문에 겨드랑이가 쓰릴 일이 없겠다 팔을 불쑥 내밀어 깃털구름을 건져 올리거나 가장 처음으로 붉게 물들 잎사귀 한 장도 찾아내지 못하겠다 나는 창문 밑에 쭈그리고 앉아 빈 밥그릇을 긁는다 쓸쓸할 법도 한데, 통 말..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층층나무의 잠 / 백상웅 층층나무의 잠 / 백상웅 철가죽을 뒤집어쓰고 누가 사나? 층층상회 외벽을 타고 자란 철제 계단을 텅텅, 밟고 올라 허름한 가죽을 빌려 내가 사나? 네모난 쇠가죽 속에는 팔다리를 뻗으면 지붕을 짊어지고 기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방 아래층 마당에 혼자 살던 층층나무가 난간 없는 옥상까지 근육질 팔..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버선 / 손창기 버선 / 손창기 아카시아에도 버선발이 있는가 보다 바지랑대에 매달려 있는 꽃망울에는 발뒤꿈치가 자란다 회한과도 같은 향기를 아그데아그데 피어 올린 제 버선이 향기로운 사향주머니였다는 것 흰 옥양목을 앙감질로 밟듯 터질 듯한 속살이 드러난다 한 겹, 두 겹 속버선 벗겨진 사이로 뾰족이 코..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
파꽃 / 손창기 파꽃 / 손창기 파 속을 파먹는 건 꽃 속의 씨앗들인가 파 속을 먹으면 먹을 수록 땅 밑부터 껍질에 힘줄이 생긴다 뼈가 박힌다 제 목을 굽혀본 적 없는 파꽃 남에게 씨앗은 될지언정 단 한번도 식탁에 오르지 못한 파꽃 모가지를 꺾고 나서야 곁줄기들 속이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굽힐 줄 알아야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