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라이벌 / 천양희 나의 라이벌 / 천양희 사는 것이 더 어렵다고 시인은 말하고 산 사람이 더 무섭다고 염장이는 말하네 어렵고 무서운 건 살 때 뿐이지 딱 일주일만 헤엄치고 진흙속에 박혀 죽은 듯이 사는 폐어肺漁처럼 죽을 듯 사는 삶도 있을 것이네 세상을 죽으라 따라다녔으나 세상은 내게 무릎 꿇어야 보이는 작은..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01.25
달팽이 약전(略傳) / 서정춘 달팽이 약전(略傳) / 서정춘 내 안에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인 젖은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생이 있었다. 시집 <귀> 시와시학사. 2005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25
수묵산수 / 김선태 수묵산수 / 김선태 저물 무렵 가창오리 떼 수십만 마리가 겨울 영암호 수면을 박차고 새까만 점들로 날아올라선 한바탕 군무를 즐기는가 싶더니 가만, 저희들끼리 일심동체가 되어 거대한 몸 붓이 되어 저무는 하늘을 화폭 삼아 뭔가를 그리고 있는 것 아닌가 정중동의 느린 필치로 한 점 수묵 산수를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25
화분 / 최승호 화분 / 최승호 소외의 군락에서도 또 소외가 일어난다 밤이다 화분이 보이지 않는다 놓아둘 곳이 마땅치 않았던 화분 키가 흑두루미만 한 그러나 너절하게 입을 늘어뜨린 자태가 보기 싫었던 나에게는 사랑을 받지 못했던 화분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연다 어류처럼 축축한 밤의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01.25
오래된 다기(茶器) 외 50편 / 마경덕 오래된 다기(茶器) - 마경덕 잡지사 사무실 한 켠에 묵은 다기(茶器) 세트가 있었습니다 다관과 찻잔은 실금으로 쩍쩍 터져 있었습니다 찻물이 스며들어 더러 차향(茶香)에 손이 젖곤 하였습니다 뭉근한 물 한 잔에 실금을 둥둥 띄워 마셨습니다 이 빠진 찻잔도 쓸만했습니다 누군가 희고 깔끔한 다기..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1.01.16
어느 시인의 죽음 - 박성민 어느 시인의 죽음 - 박성민 1 변두리 허름한 헌책방 먼지를 푹 뒤집어 쓴 시집 한권 툭툭 털며 읽는다 여성지와 중학교 문제집 사이에 꽂혀있는 시인 박정만 〈그대에게 가는 길〉 유고시집 기필코 한 주먹만 더 살아야겠다던 시인의 시집 靈肉을 짜내 쓴 시인의 피울음이 곰팡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16
학습지 공장의 민자 - 전유나 학습지 공장의 민자 - 전유나 고향친구 민자. 지난겨울 서툰 자전거를 타고 야쿠르트를 배달하다가 빙판길에 넘어져 발목뼈에 금이 가 기브스를 했다는, 삐끗한 삶에 질질 끌려 함박눈이 길을 지워버린 용문동 뚝방 어디쯤 허름한 학습지 공장에 다닌다는, 썩어가는 다리를 치료하지 못해 대들보에 목..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16
빈 들에 서다 - 이 정원 빈 들에 서다 - 이 정원 저, 무청 푸르딩딩한 대님만 남은 들판 우수에 잠겨 침침하다 단물로 품었던 속정까지 내주고야 빈 들이 되었다. 산발한 은발로 밭두둑 억새꽃 몇날 며칠 손짓 거듭했어도 내 안에도 썰렁 썰렁 비어가는 들판 있는거 눈치 못채고 있다가 11월이 들녘 끝자락부터 아득 아득 저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16
희망약국앞 무허가 종묘사 - 김해민 희망약국앞 무허가 종묘사 - 김해민 삼거리 `희망약국'앞 난전이 벌어진다. 보따리에선 배추씨 무씨 아욱씨 아주까리씨 삼씨, 잎담배에 당귀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쏟아진다. 장돌뱅이끼리 마수걸이 인사 잊지 않는다. 신식 종묘사에 밀려 이제는 손님구경이 수월치 않다. 말린 무화과 같은 입을 오물거..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16
구두끈을 풀며- 김희정 구두끈을 풀며- 김희정 퇴근하면 먼저 구두를 닦는다 긴장을 늦추지 않은 끈을 다시 풀어 본다 처진 하루를 깨우다 구두보다 빛바랜 내 모습이 있다 하루도 게으름을 피우지 못한 채 구두에 광을 낸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두에 잔주름 앉아 삶의 깊이를 묻지만 나는 구두약으로 덧칠할 뿐이다 굽은 닳..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1.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