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컵의 안간힘 / 허영숙 한 컵의 안간힘 / 허영숙 마디는 뿌리의 안간힘이다 대를 잘라내고 남은 미나리 뿌리를 컵에 담아두었더니 여린 대가 새로 올라온다 한 컵의 물에 뿌리를 두고 안간힘을 다해 잘려나간 마디를 파랗게 세우고 있다 컵의 물을 숫돌에 뿌려가며 한 손으로 칼을 갈고 있는 남자,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가 뭉..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15
내 고향집에 가네 / 김현주 내 고향집에 가네 / 김현주 희미한 인기척에도 고샅까지 들리는 개 짖는 소리에 소루쟁이 아기똥풀 쇠비름 강아지풀들이 어깨 들썩이며 달려 나오는 고향집, 짙푸른 대숲 너머 창백하게 내려앉는 먹구름은 폐병쟁이 젊은 아재가 마늘 구워 먹던 사랑채에 한참을 머무르고 핏빛 노을 속, 그을음이 까맣..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15
빨랫줄 / 서정춘 빨랫줄 / 서정춘 그것은, 하늘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 줄 같다 그것은,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15
엉거주춤 / 김신영 엉거주춤 / 김신영 당신은 엉거주춤에 대해 아시나요? 다섯 시라는 시간에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어디에서 엉거주춤거리며 세상을 둘러보는 춤인데 말이죠 저녁에서 아직 밤이 오기 전의 시간에 엉거주춤 한 허리 부여잡고 애쓰며 걸어가는 춤 오후에서 저녁으로 이어지는 짧은 시간 사이 고전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15
주홍단추 / 이은채 주홍단추 / 이은채 방사선과 탈의실 구석에 잠시나마 누군가의 체온을 실었던 가운들이 허물처럼 수북이 쌓여 있다 외투를 벗어 걸다 말고 블라우스 두 번째와 세 번째 단추 사이에 슬며시 손을 밀어넣는다 다가와 고요히 안기는 젖무덤 한때 터질 듯 팽팽하게 끓어오르던 시절이 있었겠다 앞자락에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15
흑싸리꽃 / 이은채 흑싸리꽃 / 이은채 정형외과 대기실에서 문득, 그의 부음을 본다 무심코 넘기던 조간신문 행간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름 살아 감히 끼어 들 수 없는, 두 번 다시 기록될 수 없는 부음난 분분, 흑싸리꽃 폈다 주검은 이렇듯 한순간에, 흑싸리껍데기로 발견되는 걸까 참 낯선, 그의 이름을 축으로 부옇게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15
달콤한 팥죽 / 김신영 달콤한 팥죽 / 김신영 동지섣달 팥죽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아니, 아버지가 팥죽을 끓이면 모든 계절이 동지섣달 깊은 밤이 되었다 젊은 날 노동판에서 굵어진 손마디와 굳어진 어깻죽지가 제일 좋아하였다 무좀 걸린 발가락과 버거운 다리가 더욱 좋아하였다 나의 어린 시절, 어머니는 세상에서 아버..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15
호랑거미 역사책 / 정연희 호랑거미 역사책 / 정연희 호랑거미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이다 그는 가늘고 질긴 실로 짠 둥그런 천을 올리브가지 사이에 내걸었는데 씨실과 날실의 간격이 일정한 흰 비단 천이다 호랑거미가 그 천위에 엎드려 사초史草를 쓰고 있다 물감을 찍어서 세필로 깨알처럼 써내려갔다 햇살을 받은 글..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15
바람의 식사법 / 이종섶 바람의 식사법 / 이종섶 바람은 흔들리는 것들만 먹고 산다 흔들리지 않으면 죽은 것이라는 감별법에 따라 무엇을 만나든 먼저 흔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끼니때마다 바람의 식탁을 차려야하는 나무는 잎사귀의 흔들림까지 바쳐야 하는 삶이 괴로워 바람도 불지 않고 흔들림도 없는 어두운 땅속에서 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06
매화 분합 여는 마음 / 서안나 매화 분합 여는 마음 / 서안나 당신이 북쪽이라면 나는 북쪽을 향해 처음 눈을 뜬 누룩뱀 북쪽으로 돌아앉아 참빗으로 머리 빗어 내리면 연서를 쓰던 손가락이 쏟아진다 가고, 오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 버들눈썹 그리고 빈 배처럼 흔들릴거라 방문 닫아걸고 더운 피 식히며 남은 꽃이나 피우는 늙은 투..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