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 아이 / 이은환 오드 아이 / 이은환 한 때 내가 기르던 고양이 집을 나갔다 그는 나를 잊었다 우연히 젖은 골목길에서 마주친 사시의 뭉툭한 표정 슬픔은 그런 거다, 어쩐지 핀트가 맞지 않는 그 때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게 있다 잠시는 알아 보는 듯 멈칫하는, 눈빛은 어느 시점에서는 마치 사실 같다 그 순간에 서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30
봄밤에 너를 적시다 / 최승헌 봄밤에 너를 적시다 / 최승헌 내가 너의 몸에 초경처럼 비밀스럽게 찾아가서 그 몸을 붉게 물들이는 꽃으로 피어나거나 혹은 네 몸속을 떠도는 바람으로 산다면 너는 나의 어디쯤에서 머물러 줄 수 있을까 너에게 스며들고 싶어 수없이 내 몸을 적셨지만 불어터진 인연의 껍데기로는 어림도 없어 반송..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30
그 숲에는 오래된 산책로가 있다 / 이은환 그 숲에는 오래된 산책로가 있다 / 이은환 누가 이 길에 자주 왔었다, 길이 닳은 곳에 생각이 따스하다 은근히 눈짓을 하며 길이 휘는 그쯤에서 나도 같이 휘어본다 한 발 앞 서 먼저 걷고 있던 길은 가끔 멈추며 짐짓 정색을 하거나 그 때 슬쩍 품 안에 감추어 두었던 낭떠러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네가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30
분꽃 씨앗 / 전정아 분꽃 씨앗 / 전정아 집 앞 화단, 까만 분꽃 씨앗 보인다. 어디든 뛰어내릴 듯한 기세, 바늘에 콕 찔려도 꿈쩍하지 않을 거 같다. 그 모습, 어린 시절 남동생 안하무인으로 지켜주던 사타구니 속, 거시기 두 쪽 같다. 남녀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그 잘난 두 쪽 때문에 뺏긴 게 많다. 동생 머리통 하나만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30
저 할머니의 슬하 / 문인수 저 할머니의 슬하 / 문인수 할머니 한 분이 초록 애호박 대여섯 개를 모아놓고 앉아 있다. 삶이 이제 겨우 요것밖엔 남지 않았다는 듯 최소한 작게, 꼬깃꼬깃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귀를 훨씬 지나 삐죽 올라온 지게 같은 두 무릎, 그 슬하에 동글동글 이쁜 것들, 이쁜 것들, 그렇게 쓰다듬어보는 일 말고..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30
그림자 갈아입기 / 차주일 그림자 갈아입기 / 차주일 14년 넘게 입어온 청바지 무릎이 해졌다 날실은 닳아 없어지고 수평의 씨줄만 남아 있다 내 청춘의 무릎도 저만큼 환부를 드러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 청춘에서 어떤 수평을 보았을까 청춘을 질주해 온 내 걸음 오래오래 바라보니 수직을 코바늘처럼 당겨대는 무릎이 바로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30
오래된 마루는 나이테가 없다 / 차주일 오래된 마루는 나이테가 없다 / 차주일 딛는 순간 앙다문 울음소리 들린다 숨겨둔 絃이라도 긁힌 양 온몸으로 파장 받아내며 최소 울음으로 최대 울음을 가두었다 증조모의 관을 떠멘 걸음 삭풍처럼 휘어 받고 네발 아기 걸음을 씨방처럼 터뜨렸다 발자국 없이도 걸어가는 시어미 심사가 붙은 종가의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30
허상虛像 / 문숙 허상虛像 / 문숙 까치 한 마리가 눈밭에서 눈을 쪼고 있다 작은 발자국을 남기며 무엇을 찾고 있다 하얀 쌀밥 같은 모습에 이끌려 다닌다 허기 앞에 고개를 숙이느라 날갯짓을 잊고 있다 눈을 쪼던 부리에는 물기만 묻어난다 거듭 되는 헛된 입질에도 마음을 멈출 수가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와서 하는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30
소리가 말해주었다 / 한명희 소리가 말해주었다 / 한명희 스르륵 꽃이 지는 소리 유리창에 금이 가는 소리 물방울이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장미꽃은 여전히 붉고 유리창은 여전히 반짝이는데 물방울은 아직도 타원형을 만들고 있는데 소리가 들렸다 조금씩 꽃잎이 흔들리는 소리 유리창이, 물방울이 조금씩 흔들리는 소리가 들..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30
참마 / 최승헌 참마 / 최승헌 양평 절에서 마 몇 뿌리를 얻어왔다 아침에 밭에서 캔 참마라며 비닐봉지를 건네주는데 작고 못생긴데다 흠집이 많았다 참마라면 모양도 매끈하고 깨끗할 줄 알았는데 썩은 고구마처럼 흠집투성이다 선뜻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몸에 좋다며 갈아먹으라는 스님의 정성에 받아와 며..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