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 두 알 / 문정영 호두 두 알 / 문정영 호두알은 뇌의 주름처럼 구릉이 많아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편두통이 없다 손아귀의 힘을 채우기 위하여 호두 두 알 소리가 나도록 비벼본다 서로 전신으로 몸 대하다보면 관계가 따뜻해지는 듯, 둘 사이에 윤기가 난다 속 안의 공기들 탄탄해져 내벽을 튕기는 탓이다 그가 자주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2
물 안에서의 봄 / 조원 물 안에서의 봄 / 조원 수족관에 벚꽃이 피었다. 담벼락을 타고 오르듯 유리벽 위 사방 연속무늬로 다리를 펼치는 문어 너의 지붕은 너무 투명해서 괄약근 풀어진 음부까지 보인다 물속 향기는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물의 꽃은 물속에서만 지는가 난무한 가지로 꽃 걱정 없던 네가 그 넓은 뜰은 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2
안개의 마을 / 김성수 안개의 마을 / 김성수 1 폐수 속에도 안개는 숨어있었다 2 한 때는 들숨 한 번에도 몸을 적시던 하천에는 버드나무 휘어진 잎새들이 물결을 간질이고, 까르르 밀려나던 물살들 등허리에 빛을 이고 흘러내렸다 그 속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것들은 맑았다 풀잎이 밤새 업고 있던 이슬을 굴려 떠나는 일행..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2
저 할머니의 슬하 / 문인수 저 할머니의 슬하 / 문인수 할머니 한 분이 초록 애호박 대여섯 개를 모아놓고 앉아 있다. 삶이 이제 겨우 요것밖엔 남지 않았다는 듯 최소한 작게, 꼬깃꼬깃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귀를 훨씬 지나 삐죽 올라온 지게 같은 두 무릎, 그 슬하에 동글동글 이쁜 것들, 이쁜 것들, 그렇게 쓰다듬어보는 일 말고..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2
배꼽 / 황상순 배꼽 / 황상순 과도로 사과의 배꼽을 파내다가 돌연 아랫배가 욱신거린다 맹장은 떼어낸 지 오래, 누가 칼을 곧추 세워 내 배꼽을 도려내는 것은 아닐까 그래, 나는 아주 오래 잊고 지냈다 꽃이 떨어진 자리 굳은 상처 배꼽은 더 이상 자라는 것이 아니어서 무럭무럭 커가는 열매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31
독무(獨舞) / 엄원태 독무(獨舞) / 엄원태 검붉은 벽돌담을 배경으로 흰 비닐봉지 하나, 자늑자늑, 바람을 껴안고 나부낀다 바람은 두어 평, 담 밑에 서성이며, 비닐봉지를 떠받친다 저 말없는 바람은, 나도 아는 바람이다 산벚 꽃잎들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던 때, 눈물 젖은 내 뺨을 서늘히 어루만지던, 그 바람이다 병..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31
꽃에 대한 예의 / 황인숙 꽃에 대한 예의 / 황인숙 유독 꽃을 버릴 때가 되면 곤혹스럽다 재활용은 안될 테고 일반쓰레기 봉투랑 음식물쓰레기 봉투 어느 쪽에 버리는 게 마땅한지 망설이다 종종 동네화단 덤불에 슬쩍 얹어놓곤 했다 때가 되어간다 이미 지났을지도 꽃병은 바닥까지 말랐을 것이다 물을 부어주는 게 왠지 계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31
포도씨를 먹는 여자 / 전건호 포도씨를 먹는 여자 / 전건호 아내는 포도를 씨앗 채 삼킨다 삼킨 씨앗들이 기름진 자궁에서 싹을 틔워 마음의 넝쿨로 뻗어나는지 오지랖 포도넝쿨 같다 머문 곳마다 포도송이 같은 입담을 매단다 단내를 맡고 벌떼가 모여 들 듯 동네 아줌마들이 꼬인다 동분서주, 약속이 넝쿨처럼 꼬여 어쩔 줄 모른..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31
감성조명 / 최승헌 감성조명 / 최승헌 당신 몸은 어둡거나 밝은 적이 없어서 내가 은밀하게 드나들기에 좋군요 여기는 당신 몸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서 아주 편안해요 선명하다는 건 자신을 다 까발려서 내보이는 것이니까 신비함이 없지요 만약 당신이 차갑거나 뜨겁거나 한 가지 느낌으로만 내게 들어온다면 갑자기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31
향나무의 소유권 / 마경덕 향나무의 소유권 / 마경덕 바람이 나무의 깃털을 스치면 가지에 걸린 새소리, 일제히 향나무의 목울대를 치고 올라 건너 옥탑방 처마 밑으로 팔려갔다 발가락냄새 2g, 그늘 한 스픈, 저녁바람 반 국자 저울에 달아 만든 노래는 골목에서 가장 잘 팔리는 인기품목 그늘을 제조하는 앞집 향나무는 참새들..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