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 이수지 봄날 / 이수지 기타를 치고 싶었다. 일어도 배우고 싶었다. 장래 희망 란에는 언제나 디자이너라고 적어 넣었다. 우리 집 가장은 소주병과 약봉지였다. 삼청교육대에서 씀바귀 같은 절망을 키우고 돌아온 아버지는 어느 날 소주병이 되어 세상 밖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정부보조금으로는 뇌종양에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4
무량법회 / 이홍섭 무량법회 / 이홍섭 오늘은 큰 법당 대들보를 올리는 날 아침부터 노보살들이 산길을 오르는데 하나같이 다리가 성치 않다. 한발을 옮길 때마다 뼈마디 뼈마디에서 터져 나오는 한숨과 한숨 저 성근 다리로 자식을 낳고, 업고 기르고 지아비의 밥상을 나르고 늙으신 부모님과 또한 언제나 늙으신 부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4
너무 멀리 와 있네 / 임영조 너무 멀리 와 있네 / 임영조 어딘가에 떨어뜨린 단추처럼 어딘가에 깜박 놓고 온 우산처럼 도무지 기억이 먼 유실물 하나 찾지 못해 몸보다 마음 바쁜 날 우연히 노들나루 지나다 보네 다잡아도 놓치는 게 세월이라고 절레절레 연둣빛 바람 터는 봄 버들 그 머리채 끌고 가는 강물을 보네 저 도도하게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4
반달 / 이성선 반달 / 이성선 반은 지상에 보이고 반은 천상에 보인다 반은 내가 보고 반은 네가 본다 둘이서 완성하는 하늘의 마음꽃 한 송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4
겨울옷, 내 보풀들 / 조정 겨울옷, 내 보풀들 / 조정 솔기를 털고 주름을 편 옷들이 씨앗 봉지처럼 가지런하게 어둠 속으로 돌아간다 묵은 먼지가 빛을 피해 앉는다 나도 겨우내 샛길을 따라왔다 되도록 따뜻하게 웃었지만 되도록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낮은 지붕들 사이에서 하늘이 내려다보았다 많은 옷이 나를 가리지 못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4
고요 / 이원 고요 / 이원 시간을 깎는 칼이 있다 시간의 아삭거리는 속살에 닿는 칼이 있다 시간의 초침과 부딪칠 때마다 반짝이는 칼이 있다 시간의 녹슨 껍질을 결대로 깎는 칼이 있다 시간이 제 속에 놓여 있어 물기 어린 칼이 있다 가끔 중력을 따라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칼이 있다 그때마다 그물처럼 퍼덕..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4
새해 첫 기적 / 반칠환 새해 첫 기적 /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0.04.14
무늬석에 묻다 / 김추인 무늬석에 묻다 / 김추인 돌 하나 건져내면 물내난다 물의 멀고 긴 유적, 억만 소리의 냄새 지질의 빛의 유전자가 보인다 백만 년 전 강물의 자모음 들린다 물속의 돌이 궁구하던 해와 해 사이 밤과 밤 사이를 내다보며 새의 문양을 천 년에 한뜸씩 중얼중얼 새겼으리라 전생의 전생으로부터 받아 온 별..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2
겨울들판 / 김다연 겨울들판 / 김다연 못 자국 깊은 옷을 펼쳐 입는다 잡아당기고 끌리면서 바람 배어든 자리마다 제 울음 괴며 낟알 쪼는 새처럼 못으로만 박음질한 겨울들판 못자리 꿴 채 한 벌로 한철을 난다 솔기 틀어진 고랑마다 그저 묵힐 수만 없다던 발씨 한 발 한 발 물꼬 트며 잡힌 지 오래된 물집을 홀친다 굳..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2
봄, 그 발긋거리는 것들 / 김추인 봄, 그 발긋거리는 것들 / 김추인 무희들이 돌아올 시각이다 이정표 하나 안전표지 한 조각 없이 무사귀환 할 수 있을까 하늘빛도 물빛도 파릇한 옹알이 눈치 챘지만 자고 깨면 새로 당도한 풋것들의 북적거림에 등달아 마음이 뜬다 취재라도 하듯 카메라를 치켜들고 봄의 경계를 쑤셔보지만 번번이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