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에 빠진 의자 / 유종인 저수지에 빠진 의자 / 유종인 낡고 다리가 부러진 나무의자가 저수지 푸른 물 속에 빠져 있었다 평생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아온 날들을 살얼음 끼는 물 속에 헹궈버리고 싶었다 다리를 부러뜨려서 온몸을 물 속에 던졌던 것이다 물 속에라도 누워 뒷모습을 챙기고 싶었다 의자가 물 속에 든 날부터 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6
하지 무렵 / 이해리 하지 무렵 / 이해리 한 마장이나 남은 햇볕이 상추 파는 할머닐 불러냈다 뽀얀 노을을 켜 놓은 할머니 얼굴, 앞니가 세 개 빠져 있다 광명부동산 문을 빠금 열었다가 떠밀려 나오는 함지박엔 땡볕에 그을려 싱싱한 상추들이 푸른 눈을 뜨고 파닥 거린다 딘장에 비비묵으마 을매나 꼬시다고 색시, 마 다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6
김밥 마는 여자 / 장만호 김밥 마는 여자 / 장만호 눈 내리는 수유 중앙 시장 가게마다 흰 김이 피어오르고 묽은 죽을 마시다 보았지, 김밥을 말다가 문득 김 발에 묻은 밥알을 떼어먹는 여자 끈적이는 생애의 죽간竹簡과 그 위에 찍힌 밥알 같은 방점들을, 저렇게 작은 뗏목이 싣고 나르는 어떤 가계家系를 한 모금 죽을 마시며..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6
노끈 / 윤준경 노끈 / 윤준경 어둑한 사랑채에서 할아버지는 노끈을 꼬고 계셨다 잘 다녀오너라 하실 때에도 잘 다녀왔니 하실 때에도 긴 가래를 목으로 넘기시며 노끈을 꼬셨다 노끈은 길게 이어져 둥근 타래를 만들며 구부러진 시렁 위에서 아무의 눈길도 받지 않았다 할머니는 이따금 아무짝에 쓸모 없는 짓이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6
비에도 그림자가 / 나희덕 비에도 그림자가 / 나희덕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고 과일 파는 할머니가 비 맞으며 앉아있던 그 자리에 사과 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양의 고슬 고슬한 땅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 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 자두 몇 알 사면서 훔쳐본 마른 하늘 한 조각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6
直放 / 유홍준 直放 / 유홍준 아아 이 두통 지금 나에겐 직방으로 듣는 약이 필요하다 그렇다 얼마나 간절히 직방을 원했던지 오늘 낮에 나는 하마터면 자동차 핸들을 꺾지 않아 직방으로 절벽에 떨어져 죽을 뻔했다 직방으로 骨로 갈 뻔했다 오, 직방으로 다가오는 연애, 쏟아져 내리는 눈물, 폭포 안다, 미친 자만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6
안경 / 유홍준 안경 / 유홍준 이런 너는 두 다리를 귀에다 걸치고 있구나 아직 한 번도 어디를 걸어가 본 적이 없는 다리여 그러나 가야할 곳의 풍경을 다 알아서 지겨운 다리여 그렇구나 눈(目)의 발은 귀에다 걸치는 것 깊고 어두운 네 귓속 귀머거리 벌레 한 마리가 발이란 발을 모두 끌어 모으고 웅크리고 있구나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6
저울의 귀환 / 유홍준 저울의 귀환 / 유홍준 쇠고기 한 근을 샀다 하얀 목장갑 낀 정육점 여자의 손이 손에 익은 한 근의 무게를 베어 저울 위에 얹었다 주검의 一部를 받아 안은 저울바늘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저울이 내게 물었다 인간들의 약속이란 고작 이 한 근의 무게가 모자란다고 보태거나 넘친다고 떼어내는 것?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6
깊은 발자국 / 유홍준 깊은 발자국 / 유홍준 봄가뭄 보름에 그만 물 가둬놓은 못자리, 논바닥이 때글때글 말랐다 못자리 만든다고 내 맨발이 딛고 다닌 발자국 옴폭한 곳에 올챙이 새끼들이 오골오골 말라죽었다 아! 내 몸뚱어리 무게를 싣고 다녔던 발자국 속이 저 올챙이들의 生死가 걸린 궁지였다니, 울음으로 밤 하나 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6
자전거, 이 강산 낙화유수 / 최을원 자전거, 이 강산 낙화유수 / 최을원 길가 철책 너머, 오래 방치된 자전거를 안다 잡풀들 사이에서 썩어 가는 뼈대들, 접혀진 타이어엔 끊어진 길들의 지문이 찍혀 있고 체인마다 틈입해 화석처럼 굳은 피로들, 한때는 자전거였던 그 자전거 한 사내를 안다 새벽, 비좁고 자주 꺾인 골목을 돌아 돌아서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