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문신 / 박완호 아내의 문신 / 박완호 1 아내의 몸 속엔 내가 지나온 길들이 들어 있다 얼마 전부터 아내는 제 속에 감추고 있던 길들을 꺼내 한 번 들어가 보라며 내게 입구를 보여준다 함께 산 지 십 수 년 동안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길들, 어느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세상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낯설지 않은 길들..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2
폐광 / 박후기 폐광 / 박후기 아버지, 검은 입 벌린 채 눈 감았다 나는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진달래꽃보다 늦게 병원에 도착한 나는 아버지 다리가 녹슨 레일처럼 구부러지지 않게 두 팔로 힘껏 무릎을 눌렀다 막장은 벽만 있을 뿐, 바닥이 없었다 발밑을 파내려가도 눈앞엔 검은 벽, 바닥은 어느새 궁륭이 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2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 / 정진규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 / 정진규 얼마라던가 그 정확한 단위는 잊었지만 아무튼 몇 만 톤, 그런 정도의 어마어마한 힘! 이른 봄 언땅 밀고 나오는 여린 새싹 한 잎의 힘을 그 초록힘을 수치로 산출해보면 그렇다고 했다 우리 여자들이 밀물 썰물로 제 몸 속에 가두고 있는 바다, 애기를 낳는 힘, 그 절..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2
참깨꽃 / 문신 참깨꽃 / 문신 참깨꽃 보면 오래 묵은 범종 같다 당목(撞木)으로 두드리면 부처님 말씀이 서 말 하고도 한 닷 되쯤은 쏟아질 것 같다 저기 저 한 뙈기도 안 되는 비탈밭 가득 참깨꽃 피었다 범종이 무릇 일만 송이는 된다 쳐라, 바람아 부처님 설법을 깨알 같은 필체로 옮겨 적어 마침내 팔만대장경을 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2
칼 / 안명옥 칼 / 안명옥 칼은 너무 많은 생각을 가질 때 위험하다 칼을 잡을 때 오른 손은 방향을 잡고 왼손은 힘을 줘야 한다는데 생각이 많아서인지 방향을 잃어버린 칼에 마음만 베어나간다 칼을 내리칠 때마다 내가 칼이 되었다 자를수록 더 잘라지지 않는 칼질은 내 심장의 혈압처럼 방망이질 하고 내 몸속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2
슬리퍼, 쓰레빠 외 1편 / 정익진 슬리퍼, 쓰레빠 / 정익진 슬리퍼, 왠지 쫄딱 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저것 봐,껌 짝짝 씹으며, 두 손 청바지 앞주머니에 팍, 찔러 넣고 삐딱하게, ‘에이 제기랄’ 하는 표정으로 쓰레빠 질질 끌고, 기산비치상가 앞을 지나는군, 저 자식이 앞으로 커서 뭐가 되려나? 너 도대체, 어딜 그렇게 쏘다니냐?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2
일생 / 장정자 일생 / 장정자 꽃 피우면서 늙는 나무가 있다 꽃 피면서 죽는 나무가 있다 업고 뛰던 메뚜기는 잡혀서도 업고 있다 짝짓기 끝낸 수컷을 암놈 사마귀가 아작아작 먹고 있다 부채질하다 알이 깨어나자 탈진해 죽은 수컷 얼룩동사리 큰가시고기 둥지 지어 천 개의 알을 낱낱이 흔들어주다 파리해져 죽다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2
고단 孤單 / 윤병무 고단 孤單 / 윤병무 아내가 내 손을 잡고 잠든 날이었습니다 고단했던가 봅니다 곧바로 아내의 손에서 힘이 풀렸습니다 훗날에는, 함부로 사는 내가 아내보다 먼저 세상의 만남과 손을 놓겠지만 힘이 풀리는 손을 느끼고 나니 그야말로 별세別世라는 게 이렇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날이 오면, 아내의 손..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2
별이 뜰 때 / 이기철 별이 뜰 때 / 이기철 나는 별이 뜨는 풍경을 삼천 번은 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별이 무슨 말을 국수처럼 입에 물고 이 세상 뒤란으로 살금살금 걸어오는지를 말한 적이 없다 별이 뜨기 전에 저녁쌀을 안쳐놓고 상추 뜯으러 나간 누이에 대해 나는 쓴 일이 없다 상추 뜯어 소쿠리에 담아 돌아오는 누..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2
꽃섬, 가다 외 1편/ 서동인 꽃섬, 가다 외 2편/ 서동인 오라는 말 없어도 달려갑니다 바다가 피우는 꽃, 뚝뚝 떨어지는 붉은 섬을 보러 갑니다 꽃소식에 놀란 종착역 기차가 바다로 도망칩니다 파도가 기적을 울립니다 꽃섬의 동백은 꽃으로만 피지 않습니다 횟집의 해삼, 멍게, 개불도 꽃으로 피어납니다 피고 지는 일이 어디 꽃..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