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생각/이은상 고향 생각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 하기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으로 나갔더니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만 출렁거리오. 고개를 수그리니 모래 씻는 물결이오. 배 뜬 곳 바라보니 구름만 뭉기뭉기 때 묻은 소매를 보니 고향 더욱 그립소. ―이은상(1903~1982) '고향(故鄕)'은 박제돼가고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8.10
明器/이문재 明器 나는 苦生해서 늦게 아주 늦게 가고 싶다 가장 오래된 길에 들어 저승 가서 사용할 이쁜 그릇들, 明器 이승 밖에서 무덤 안쪽에서 오래 써야 할 집기들 사람은 돌아가고 미래는 돌아온다 사람은 미래의 작은 부장품 나의 부장품일 이 느슨한 고생 이 오래된 미래 ―이문재(1959~ ) 유재..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8.10
꽃/이덕규 꽃 한 해 동안 캄캄한 흙 속을 뒤져 찾아낸 걸 한순간 허공에 날려버렸다 해마다 똑같은 패를 쥐고 나와 일 년치 노역을 아낌없이 걸고 던지는 화투(花鬪), 향기로운 꽃놀이 끝에 집에 가는 차비나 해라 국밥이나 먹어라 개평을 뚝 떼어주는 이 아름다운 도박판의 결정(結晶) 까맣게 굳어..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8.10
익는다/이상교 익는다 처음 가는 낯선 길 멀기도 하다. 두 번 세 번 가는 동안 길가 쌀가게, 키 큰 가로수 눈에 익는다. 약국 간판, 모퉁이 구두 가게 눈에 다 익는다. 눈에 익어, 발에 익어 가까워진 길. 처음에는 낯설던 얼굴도 눈에 익고 귀에 익어 가까워진다. 점점 가까워진다. ―이상교(1949~ ) 유재일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8.10
지게/김영승 지게 할머니들은 여기가 어디에요? 잘 묻는다 그 불안한 표정은 어머니다 여기가 어딘가? 가 아닌 弱者의 모습 전철에서 할머니들은 륙색을 하나씩 메고 驛谷에서 松內 전철은 幻燈機처럼 스친다 창밖 丹楓은 쏟아져 할머니들은 ―김영승(1959~ ) 내가 주로 다니는 역은 한성대·대학로·..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8.10
천일염/윤금초 천일염 가 이를까, 이를까 몰라 살도 뼈도 다 삭은 후엔 우리 손깍지 끼었던 그 바닷가 물안개 저리 피어오르는데, 어느 날 절명시 쓰듯 천일염이 될까 몰라. ―윤금초(1943~ ) /유재일 숨이 턱턱 막히는 가마솥 속이다. 햇볕에 성냥을 대면 불이 일 것만 같다. 쨍쨍쨍 쇳소리가 나는 것도 같..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8.10
지붕 위의 살림/이기인 지붕 위의 살림 검은 지붕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이 필 때 붉은 고무대야에 수돗물을 틀어놓고 찌든 이불을 치댈 때 흰 구름이 지붕을 덮고 나무를 덮고 마을을 덮고 지나갈 때 까칠까칠한 수염의 가장이 숫돌에 칼끝을 문지를 때 지붕으로 뛰어올라온 닭이 벌어진 꽃의 이름을 캐물을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8.10
소리 내어 읊다/신흠 소리 내어 읊다 믿지를 못하겠네, 인간의 술이 가슴속 걱정을 풀어낸단 말 거문고 가져다가 한 곡조 타고 휘파람 길게 불며 언덕에 올라 천리 너머 먼 곳을 바라보자니 광야에는 쏴아 쏴아 몰려온 바람 현자도 바보도 끝은 같나니 결국에는 흙만두가 되어버리지 작은 이익 얼마나 도움된..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8.10
파도/황베드로 파도 바닷가 모래톱에 동시 하나 써 놓고 돌아앉아 손 우물 파다 보니 파도가 다 외웠다고 하얗게 지워버렸네 가방에 꽉 찬 방학 숙제 파도에게 갖다 주고 우리는 놀까? 갈매기처럼 ―황베드로(1940~ ) 이 동시를 읽으니 프랑스 시인 장 콕토의 시 '귀'처럼 문득 내 귀는 소라껍데기가 되어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8.10
분꽃송(頌)/한분순 분꽃송(頌) 환히 웃었지만 곁에 설 머슴애 있니? 사위듯 피는 꼴이 제참에도 사뭇 수줍어 마당을 한 바퀴 돌다가 먹빛 티로 남는다. 긴 비[雨]에 지치면 말인들 뛸까만 여름이 지루해서 산도 제자리채 녹네 슬며시 감기는 빛살 문득 신선한 이마여. ―한분순(1943~ ) 이철원 시골집 꽃밭에는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