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바라보니/조오현 내가 나를 바라보니/조오현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를 바라보니 기는 벌레 한 마리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 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 ―조오현(1932~ ) 세상은 그 자체로 큰 스승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의 스승이고 선지식(善知識)이다. 그들의 삶이 경전이고,..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5.31
튤립/김영남 튤립/김영남 아이들이 울고 있다 난 그 아이들을 달랜다 빨갛게 울고 있는 것들을 아니 노랗게 우는 것들을 그러나 내 노력 효험 없어 꽃밭 더 시끄러워지고 자전거 세우고 소녀 한 명이 내린다 여기저기 기웃기웃하더니 튤립 한 송이 꺾는다 아이들 울음이 뚝 그친다 그러고 보면 이 세..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5.31
아이들에게(次兒輩韻還示·차아배운환시) 아이들에게(次兒輩韻還示·차아배운환시) 한밤에 때때로 조용히 앉아 등불을 마주해도 부끄럽지 말아야지 몸이 즐거우면 지금이 옛 태평성대고 마음을 비우면 불길도 얼음처럼 식는다 첫 관문을 열고 간 이 누구일까 저 높은 언덕에 오르려는 자 없구나 배움이란 탑을 오르기와 같나니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5.31
국경/이용악 국경/이용악 새하얀 눈송이를 낳은 뒤 하늘은 은어의 향수처럼 푸르다 얼어죽은 산토끼처럼 지붕은 말이 없고 모진 바람이 굴뚝을 싸고돈다 강 건너 소문이 그 사람보다도 기대려지는 오늘 폭탄을 품은 젊은 사상이 피에로의 비가에 숨어 와서 유령처럼 나타날 것 같고 눈 우에 크다아란..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5.31
어머니/김종상 어머니/김종상 들로 가신 엄마 생각 책을 펼치면 책장은 그대로 푸른 보리밭 이 많은 이랑의 어디 만큼에 호미 들고 계실까 우리 엄마는 글자의 이랑을 눈길로 타면서 엄마가 김을 매듯 책을 읽으면 싱싱한 보리 숲 글줄 사이로 땀 젖은 흙냄새 엄마 목소리 ―김종상(1935~ ) 어린 시절 어머..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5.31
기억해 내기/조정권 기억해 내기/조정권 혼자 진 꽃. 진 채 내게 배송된 꽃. 발송인을 알 수 없던 꽃. 그 꽃을 기억해 냈다. 슈베르트 음악제가 한 달간 열린 알프스 산간 마을 한가로이 풀꽃에 코 대고 있는 소 떼들이 목에 달고 다니는 방울 그 아름다운 화음에서 ―조정권(1949~ ) 피어나는 꽃들이 감탄을 부른..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5.31
단란/이영도 단란/이영도 아이는 책을 읽고 나는 수를 놓고 심지 돋우고 이마를 맞대이면 어둠도 고운 애정에 삼가한 듯 둘렸다. ―이영도(1916~1976) 오랜만에 꺼내보는 말이다. 단란, 그 말에서는 정갈한 속옷이나 따뜻한 밥상 혹은 풀 잘 먹인 옥양목 호청 같은 게 떠오른다. 그런 온기의 '단란'이 불현..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5.31
한양호일(漢陽好日)/서정주 한양호일(漢陽好日)/서정주 열대여섯짜리 少年이 芍藥(작약)꽃을 한아름 自轉車뒤에다 실어끌고 李朝의 낡은 먹기와집 골목길을 지내가면서 軟鷄(연계)같은 소리로 꽃사라고 웨치오. 세계에서 제일 잘 물디려진 玉色의 공기 속에 그 소리의 脈이 담기오. 뒤에서 꽃을 찾는 아주머니가 白..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5.31
호젓한 집 (幽居·유거) 호젓한 집 (幽居·유거) 봄풀이 사립문에 오른 곳 숨어 살아 세속의 일 드무네 꽃이 나직해 향기 베개에 스미고 산이 가까워 비췻빛 옷에 물드네 가는 빗방울 못물에서나 보이고 약한 바람 버들 끝에서나 알겠네 천기(天機)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곳 담담하여 마음과 어긋나지 않네 春草..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5.31
모란의 얼굴/최정례 모란의 얼굴/최정례 젊고 예쁜 얼굴이 웃으며 지나가고 있다 나를 보고 웃는 것은 아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빨간 꽃잎 뒤에 원숭이 얼굴을 감추고 일요일 아침 모두가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가자! 결의하고는 떠나고 있다 맹인의 지팡이 더듬어 잡고 ―최정례(1955~..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