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 / 이향지 밭 / 이향지 그녀는 밭을 팔았다 당산나무 아래 앉아 한숨을 쉬고 정월 지난 보리 이랑을 오래 밟아주고 밭 파시오 조르던 사람을 찾아갔다 밭 판 돈으로 딸은 서양사학과에 등록을 했다 밭 판 돈을 들고 간 빚 쟁이는 다시 오지 않았다 밭 판 돈으로 남편은 담배를 사고 막내는 운 동화를 사고 대학을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6
구슬이 구슬을 / 이향지 구슬이 구슬을 / 이향지 둥근 것은 둥근 것을 안지 못한다 유리구슬이 유리구슬을 밀어내었다 구슬이 구슬을 치면 구슬 탓이냐 구슬 탓이다 둥글둥글 맨질맨질 전신이 정점인 저 잘난 구슬 탓이다 민다고 쪼르르 달려와서 저와 똑 같은 것을 쳐서야 되겠느냐 치자고 밀었겠느냐 둥글둥글 어울려서 놀..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6
멧새소리 / 백 석 멧새소리 / 백 석 (1912-1995: 본명 백기행)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별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게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려있다.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6
모닥불 / 백석 모닥불 / 백석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거랑닢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짖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갖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장..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6
女僧 / 백석 女僧 / 백석 女僧은 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 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十年이 갔다 지..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5
수라 修羅 / 백석 수라 修羅 / 백석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느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두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5
이, 도둑놈의 꽃아 / 고영민 이, 도둑놈의 꽃아 / 고영민 여름이 지나자 봉숭아 줄기 밑 큼지막한 자루가 생겼다 어느 집 젊은 과부라도 보쌈한 듯 온통 안주머니가 불알처럼 탱탱하다 자루를 움켜쥔 손목에 힘이 들어가 있다 그 불알 같기도 하고 젖통 같기도 한 주머니를 살짝 손으로 건드리니 에그머니나, 그 속에 몸이 단 과부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5
밥그릇 / 고영민 밥그릇 / 고영민 밥하던 아내가 포개진 밥그릇이 빠지지 않아 나에게 들고 왔다 그릇이 그릇을 품고 있다 내 안에 있는 당신의 아픔 당최, 힘주어 당겨도 꼼짝하지 않는다 물기에 젖어 안으로 깊어진 마음 오늘은 저리 꼭 맞았나 보다 한 번쯤 나는 등 뒤에서 너를 안아보고 싶었네 선반 위, 씻긴 두 개..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5
나팔꽃과 개미 / 고영민 나팔꽃과 개미 / 고영민 나팔꽃을 들여다보니 그 속 개미 서너 마리가 들어있다 하느님은 가장 작은 너희들에게 나팔꽃을 불게 하시니 나팔꽃은 천천히 하늘로 기어오르고 하루하루의 푸른 넝쿨줄기, 개미의 걸음을 따라가면 나팔꽃의 환한 목젖 그 너머 개미는 어깨에 저보다 큰 나팔꽃을 둘러메고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5
즐거운 소음 / 고영민 즐거운 소음 / 고영민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건물 전체가 울린다.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 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 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나는 웃으면서 참는다...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5